On my own

레 미제라블의 <on my own>을 번역해 본다. 한국 초연할 때 번역된 노랫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뮤지컬 레 미제라블 가사 번역 전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에포닌의 절절한 마음이 한국어 노래에서는 잘 전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번역. 일상언어이면서 동시에 라임과 리듬을 맞추면서 곡에 맞게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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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my own 나 홀로

Pretending he’s beside me 그이가 곁에 있는 것처럼

All alone 혼자서

I walk with him till morning 함께 맞이하는 아침

Without him 그이 없어도

I feel his arms around me 그의 두 팔이 감싸 와

And when I lose my way I close my eyes 길을 잃으면 나는 두 눈을 감지

And he has found me 그럼 그이가 나를 찾지

 

In the rain the pavement shines like silver 비가 와, 은빛으로 반짝이는 도로

All the lights are misty in the river 강물은 가로등으로 빛나고

In the darkness, the trees are full of starlight 어두워도 나무는 별빛 가득히

And all I see is him and me forever and forever 이 세상은 그이와 나 영원히 영원히

 

And I know it’s only in my mind 알아요. 혼자만의 상상이란 걸

That I’m talking to myself and not to him 그 없는 나만의, 나한테하는 혼잣말

And although I know that he is blind 그이는 아무것도 몰라줘요

Still I say, there’s a way for us 그래도 우리를 위한 길은 없을까요

 

I love him 사랑해

But when the night is over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He is gone 그는 가

The river’s just a river 강은 그저 강이야

Without him 그이 없으면

The world around me changes 빛나는 세상은 모두 변하고

The trees are bare and everywhere 나무는 헐벚고 모두 마르고

The streets are full of strangers 거리는 온통 낯선 사람들로만

 

I love him 사랑해

But every day I’m learning 하지만 난 매일 깨달아

All my life 내 인생

I’ve only been pretending 난 짝사랑으로 살았네

Without me 나 없어도

His world will go on turning 그이는 잘 살아가겠죠

A world that’s full of happiness 그 세상 그 가득한 행복

That I have never known 그건 내가 모르는 행복

 

I love him 사랑해

I love him 사랑해

I love him 그이를 사랑해

But only on my own 하지만 나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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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in’ in the wind

딸을 위한 <Blowin’ in the wind>

지난 주부터 틈만 나면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니까 아이들도 그냥 흥얼거린다. 오늘 딸이 샤워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샤워 끝나자마자 아빠한테 가르쳐달라고 한다. 나는 아직 딸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따님용 버전은 메타포를 없애고 그냥 내멋대로 가르쳐주기로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남자가 남자가 되려면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 아니?

평화롭게 쉬기 전에

여자가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아니?

영원히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포탄으로 죽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옛날 옛적에 산이 깎여서 바다가 됐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옛날 옛적에는 자유가 없었대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로 죽었을까?

나쁜 짓을 봤는데도 고개를 돌리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어째서 노예들은 하늘을 보지 못할까?

하늘이 저렇게 예쁜데

어째서 사람들은 귀를 막고 살까?

이쪽 저쪽 울고 있는데

언제까지 사람들은 모른 척 할까?

저러다가 연약한 사람들 다 죽겠네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Blowin’ in the wind> 바람에 날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Before you call him a man ?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저 흰 새는 얼마나 많이 날아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 모래밭에서 쉴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 영원히 멈추게 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Before it’s washed to the sea ? 산이 바다로 떠내려갈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돌리며

Pretending he just doesn’t see ? 또 외면하는 것일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들어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나서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 그는 그 죽음을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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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인가 교양인가

<네트 세계에서의 개인정보에 관해서>

나는 매우 리버럴하지만 개인 인권의 경계를 함부로 넓히는 것에는 반대한다. 경계를 너무 넓히면 정작 인권으로 보호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상대화된다.

나는 페이스북에 나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아이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언젠가 프랑스에서는 자기 아이 사진 따위를 페이스북에 동의 없이 공개하면 부모가 처벌 받는다는 페북 담벼락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신문보도에서 초래된 이야기인데 아마도 사실확인 필요할 것이다. 개인의 사적인 행위를 국가가 함부로 개입하기도 어렵거니와 이를 처벌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주민번호나 여권 번호 등이 공개되면 위험하다는 정도는 누구나 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정보를 공개할 때에는 그런 민감한 정보를 제외한다. 하지만 출신/학교/직업 등을 내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하는 것은 일종의 타인에 대한 예의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네트 속의 나와 실제의 나는 거의 차이가 없다. 나는 그게 좋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단순하고 투명한 것을 선호한다.

타인에 관해서는 좀처럼 올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SNS 계정에 올리는 글은 나에 관한 글이며 이 세상을 향한 나의 발언이지 타인에 관한 글도 타인의 발언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에 관해서는 거의 올리지 않는다. 그것은 아내와 합의된 사항이다. 명시적인 동의, 암묵적인 동의, 확고한 신뢰가 있는 경우에만 타인에 대한 정보를 페북에 공개한다. 아이들은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다. 물론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올리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은 내 페북을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또 보고 있다. 네트 세계의 각종 기록은 나와 내 관계에 관한 길고 두꺼운 기록이며 유언장이다. 설령 내 가족과 몇몇 사람들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한 개인의 기록유산에 불과할 뿐이며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그저 삭제될 뿐이다.

인권에 대한 일반론적인 내 생각은 이러하다.

신체에 관한 일체의 권리와 내 생각의 표현에 관한 여하한의 권리는, 타인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는 조건하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존중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 조건조차 가급적 엄격하게 제한돼야 한다. <나의 인권> 영역에는 타인이 들어올 수 없고, 국가조차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인권을 나는 존중해야 한다. 인간 각자는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공평하지만 사람들은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위계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불공평이 생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은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

현생 인류가 역사 속 인류와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다르다는 점이 아닐까? 거의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인류는 개인개인의 인권을 몰랐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고 긴 시간이 걸렸다. 약자의 인권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한편,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진보는 개인과 개인의 간격을 없애고 공유의 장을 넓혔다. 그 공유의 장에 어쩔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발적인 참여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전자는 기술적인 작용이며 후자는 문화효과이다. 기술과 문화의 공동작용으로 생긴 개인정보의 유출 문제를 인권의 시각을 보면 아주 곤란해지는데, 인권이라는 타인의 개입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권리라는 속성과 타인의 개입이 일상화되는 네트워크 세계의 속성이 충돌해버리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사자’가 네트워크를 안 하면 된다. 자발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어떤 개인에게도 그렇게 요구할 수는 없다.

이렇듯 나는 개인 정보를 인권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교양으로 본다. 내가 타인의 기분을 존중하고 입장을 배려하는 것처럼 내 기분도 존중되고 배려 받기를 원하는 교양. 인권과는 다르다. 인권이 침해 당하면 그것은 정의를 위협한다. 그러나 교양을 침해 당하면 그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다. 그런데 사람마다 교양이 다르다.

‘정보인권’이라는 단어를 발명해서 개인정보를 인권차원으로 승격시키는 사람을 종종 보지만 나는 동의하기 싫다. 낮은 차원의 개인정보로는 내 이름, 전화번호, 주소, 이메일주소, 사진이 있겠다. 이것이 타인에게 무단으로 유출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인권이 침해 당했다고 여기는 것은 지나치다.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런 정보를 스스로 공개하며 팔고 다닌다. 각종 SNS는 더욱 능동적이며 자발적인 공개를 촉발한다. 그리고 공유된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인권을 버리는 사람들일까? 어떤 공유는 괜찮고 어떤 공유는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인권이라는 가치를 희화한다. 인권은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중되어야 하는 가치가 인권이지 사람마다 다른 것은 인권의 범주로 함부로 논의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는 개인정보의 유출이 있어도 어떤 이는 분개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의 교양은 민감한 것이고 후자는 둔감한 것일 텐데, 타인을 배려한다는 문화수준에서는 기분 나쁘게 만드는 행위 자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 경우 인권을 운운하기보다는 문화수준 차원의 비난을 앞세우는 것이 좋고, 다른 법률의 존재를 찾는 게 낫다.

한국에서 휴대폰 번호는 고유정보이기도 하며 공유정보이기도 하다. 선거 때마다 정당구별 없이 이곳 저곳에서 광고용 메시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민주주의 정당이 인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는 없고, 그저 낮은 문화수준을 탓하는 게 더 적확할 것이다.

좀더 높은 차원의 개인정보로는 주민번호나 지문 같은 신체 정보가 있겠다. 이 또한 인권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람을 특정하는 고유 정보라는 특성이 있고, 자칫 범죄로의 오용 가능성이 있으므로 특별히 보호되어야 하겠지만, 주민번호나 지문이 생명에 관련된 것도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필수적이지 않다. 주민번호가 없다고 해서 인간존엄성이 무시되는 것도 아니며, 지문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거나 지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존엄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지문이나 주민번호를 알려줘야만 모종의 거래나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요구가 인권의 문제로 비쳐지는 것도 곤란하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적 교양의 문제이며 나는 그 교양에 굶주려 있다. 한편 지문이나 주민번호가 무단으로 유출되는 사고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인권침해 때문이 아니라 범죄로의 오용 가능성과 재산상의 손해 우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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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지식의종말

(제1편 지식의 시대) http://wp.me/p3Xhl1-ye

(이어서)

대중매체 9.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화하므로 산업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지식의 전파와 그것에 대한 옹호가 필요했다.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하였다. 근대 최초의 신문은 1605년 스트라스부르의 요한 카롤루스(Johann Carolus)에 의해 창간되었다. 이라는 주간신문이었다. 최초의 일간지는 1650년 였다. 권력은 언론을 좋아할 리 없고 높은 세금을 부가했다. 독자는 일부 부유한 층에 국한되었다. 18세기에는 여러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카페가 등장했다. 부르주아지는 신문을 읽으며 정치토론을 했다. 19세기가 되자 신문에 부가되는 높은 세금이 폐지되고 인쇄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노동자계급도 신문의 독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신문은 대중매체가 되었으며 지식은 더 빠르게 전파되었다. 20세기에는 방송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였다. 한편으로는 산업발전과 지식전파에 필요한 표준어의 보급, 문물의 소개, 문화소비의 자극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정치선동의 도구가 되었다. 반대파들은 권력이 대중매체를 억압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권력은 대중매체를 활용해서 반대파를 억압했다. 대중매체는 침묵하지 않으며 억압되기보다는 활용된다.

이성과 자유 10. 인쇄물과 대중매체를 통해 지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계급을 가로지르며 전파되고 국경을 넘어 공유되었다. 어떤 이는 지식으로 사상을, 어떤 이는 지식으로 민족주의를, 어떤 이는 지식으로 국가를 정립했다. 권력지향적인 지식은 대립을 격화시켰다. 어떤 이는 인류 사회의 개선하면서 지식을 활용하였고 어떤 이는 인류 사회를 악화시키면서 지식을 활용하였다. 전자는 이성을 투쟁적으로 자극하면서 권력을 지향하고 후자는 감정을 적대적으로 자극하면서 권력을 지향했다. 혁명과 전쟁이 발발했다. 이성이 승리할 때마다 인류 복리가 증진했고 감정이 승리함으로써 광기를 체험했다. 이성이 항상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무지한 곳에서 이성은 보잘 것 없었다. 지식은 자유와 함께 이성을 전파시켰다. 그러나 자유는 신분제와 관습을 이겨내야만 승리하였다. 1833년 영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4년간의 남북전쟁으로 60만 명이 넘는 군인의 죽었다. 수많은 죽음을 대가로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조선의 평화 11. 19세기 서구 인류는 사회 곳곳에서 자유를 회복하면서 자신감에 차 있었고 시끄러웠다. 지식이 전파되지 않았던 조선은 고요했다. 국민의 절반이 반은 인간이었고 반은 물건인 처참한 노예 상태였다. 노예 사회에도 평화는 있다. 무지가 전쟁으로부터 조선을 잠시 지켜주었다. 무지의 장벽이 걷힌 곳마다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12. 그 어떤 나이팅게일도 100만명이 넘는 군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1853년부터 3년 간의 크림전쟁의 참화였다. 1866년 보오전쟁으로 10만명이 죽었다. 1870년 보불전쟁으로 15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죽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전쟁과 혁명을 겪을수록 자유의 이념은 뜨거워졌고 터질듯이 팽팽해졌다. 그것은 적대적인 자유였다. 남을 무찔러서 핍박하고 죽여야만 하는 자유였다. 그것은 광기의 서막이었다. 20세기가 되자 파멸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천만 명의 군인이 죽었다. 실종자와 부상자를 포함하면 물경 4천 만 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혁명을 둘러싸고 1922년까지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270만 명의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광기는 더 큰 광기를 자극했다. 적대적 자유의 극치인 파시즘이 등장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자행된 2차 세계대전에서는 2400만 명의 군인이 죽었고 50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죽었다.

전쟁 이후 13.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20세기의 광기의 잔해물을 해결하려는 전쟁이 국지적으로 이어졌다. 지역마다 광기의 지배가 여전했다. 그러나 광기를 체험한 서구 사회는 그 광기를 통제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을 바꾸었다. 감정을 거두고 이성의 지배를 택했다. 지식은 적대감을 퍼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인 이념의 도구가 되었다. 여전히 국지적인 전쟁과 독재가 남아 있고, 전쟁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지식보다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노와 증오를 퍼뜨리고 있지만, 서구 유럽의 자유이념과 민주정치가 지구인의 보편적인 이성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은 인류사적 정치혁명이었다. 인류는 광기의 시절을 통과했다. 이제 권력지향적인 지식은 정치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지식은 시장에서 그 지배권을 찾으려고 하였다.

경제성장 14. 주요 국가의 1인당 GDP 그래프의 기울기를 살펴보면, 18세기를 시작점으로 하는 지수함수처럼 급격히 성장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21세기까지 그 기울기가 더욱 커진다. 급격한 경제성장은 식민지를 둘러싼 제국 간의 쟁탈에 의존하지 않는다. 지식의 거침 없는 확산이 시장의 크기를 늘렸다. 지식의 확산은 인프라의 확충과 기술의 발전에 큰 빚을 졌다. 교육 인프라, 발전/송전/배전 인프라, 국가행정조직, 방송통신인프라, 교통인프라 등은 필요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빠른 속도로 전파했으며 그 지식의 상품화를 가능하게 했다. 1948년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는 1959년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1971년 인텔은 세계최초의 마이크로프세서 4004를 선보였다. 1974년 개인용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모두 미국에서 벌어진 혁신이었다. 1989년 영국인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리는 월드 와이드 앱의 하이퍼 텍스트 시스템을 개발해였다. 1994년 야후가 등장했고 1998년 구글이 창립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와 익스플러러와 오피스로 20세기말을 지배하였다. 모든 산업은 비단 정보통신분야뿐만 아니라 골고루 급격히 성장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가난과 질병과 무지는 상당히 해결되었다. 이런 경제적 성공에 감탄하는 사람이 보수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제적 성공 바깥에 있는 인류 문제를 개선하려는 사람이 진보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경제후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인류는 지구의 어떤 시대에 살았던 인류보다 아는 것이 많고 하는 것도 많다. 파국이 오지 않는 한 지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생긴 활력은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다. 큰 위기가 아닌 한, 이 활력이 저 활력으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사멸할 뿐이다.

지식의 종말 15. 지식은 권위였다. 인간은 지식을 통해서 성장한다. 지식을 취해서 정치를 하고 지식을 선점해서 시장을 장악했다. 지식은 인간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지식이 재산이며 지식이 경쟁력이었다. 쓸모 있는 지식을 선점한 자가 성공하였다. 그러나 좋은 시대는 금세 끝나고 말았다. 지식의 시대는 지식의 과잉에 의해서 그 권위가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넷은 모든 사람의 생활이 되었고, 정보는 넘쳐 흐른다. 모바일 시대에 이르자 누구든지 지식을 생산하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지식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인류는 지식을 어렵게 접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사유로 이어졌지만 현대 인류는 지식을 쉽게 얻는 까닭에 덜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의 팽창은 경쟁의 심화를 낳았고 정보를 주는 대가로 사람들한테서 시간을 앗아갔다. 생각은 쉽게 얻을 수 있다. 남의 생각으로 편리하게 나의 생각을 대체할 수 있다. 지식은 검색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손 쉽게 지식을 생산하고 퍼뜨릴 수 있는 세상이 되자 지식은 잘 검색되지 않는다. 가짜 지식, 잘못되거나 과장된 정보는 네트워크 세상에 넘쳐난다. 정보는 흔하고 지식은 널려 있지만 묘하게도 그 지식을 자기 사유의 재료로 삼기는 힘들어졌다. 문이 너무 많다. 사람들은 들어가기 쉬운 문을 선호한다. 좁은 문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지식은 사라지지 않지만 너무 많은 지식에 의해 스스로 은폐된다. 우리는 푸시되며 키워드를 분양 받는다. 지식만으로는 더 이상 재산이 아니요 경쟁력도 아니다. 지식은 여전히 거래되지만 쓰레기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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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창의성의 비밀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3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50%를 넘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심사를 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줬는데 그 중 절반이 무효가 된다면 이는 부실심사의 증거입니다. 한국의 특허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특허청의 이런 부실심사 행정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1) http://wp.me/p3Xhl1-yv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2) http://wp.me/p3Xhl1-yK

(이어서)

마지막으로,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의 상관성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허무효율은 특허무효심판을 청구한 사건 중에서 관련 특허가 무효가 되는 비율입니다. 일부 무효를 포함시킬지, 각하/취하/절차의 무효를 포함해야 할지, 심급의 문제는 어떻게 할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또한 기술분야에 따라서도 달라지겠죠. 어쨌든 특허무효율은 무효가 청구된 특허 중 실제로 무효가 되는 비율입니다. 등록되어 있는 모든 특허의 잠정적 무효 비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특허경쟁력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변하는 사람을 나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먼저 누구의 특허경쟁력을 뜻합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허경쟁력? 국가 단위로 특허경쟁력을 따지는 것은 다소 몽롱합니다. 정부는 시장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국가의 특허경쟁력은 통계로만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해마다 얼마나 특허를 신청했다거나 등록했는지 따위의 통계입니다만, 흥미롭기는 해도 정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특허경쟁력이 높은 수준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반면 통계 수치로는 무엇이든 세계 탑5 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양적으로 뽐냈다고 질적인 탁월함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국가의 특허경쟁력을 분석해서는 통계밖에 얻을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시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장의 실질적인 주체는 기업이라고 볼 때, 결국 특허경쟁력은 기업의 특허경쟁력 위주로 살펴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거대한 생각의 늪 앞에 서게 됩니다. 시장은 복잡하고 기업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산업별로 특성과 환경과 요구가 다릅니다. 또 기업별로 규모와 역량과 전망이 다릅니다. 산업별, 기업별 이해관계는 천양지차입니다. 기업의 특허경쟁력을 제대로 탐색하려면 이런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맞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고찰입니다. 이쪽에서 맞는 이야기가 저쪽에서는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령을 피우겠습니다. 산업과 기업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딱 하나의 분류만 생각해 보지요. 특허권자와 특허권자가 아닌 자로 기업을 분류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술에 관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보유한 기업, 이를 <특허권자 기업>이라고 칭해보지요. 그리고 해당 기술과 관련된 시장에서 그 특허권자 기업과 경쟁하는 기업을 <경쟁자 기업>이라고 표현해 보겠습니다. 누가 산업의 주체이며 누가 시장에서 존중 받아야 합니까? 둘 다 입니다. 당연하죠. 이 당연한 문답이야말로 특허경쟁력을 따짐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특허경쟁력 운운하면서 특허권자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특허권자 기업만으로는 시장이 굴러가지 않습니다. 시장이든 국가든 산업이든 어떻게 표현하든 경제가 이루어지려면 경쟁자 기업의 이익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인류사를 돌이켜 봐도 기술의 발전은 여럿이 힘을 쓸 때 더 빠르고 크게 발전합니다. 즉, 특허경쟁력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사용할 때에는 항상 특허권자 기업뿐만 아니라 경쟁자 기업의 이익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허제도는 특허권자 기업과 경쟁자 기업을 차별 대우합니다. 국가 행정기관은 특허권자 기업에게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법원은 기본적으로 권리자를 보호하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법치국가의 보통 원리입니다. 하지만 법률은 많거든요. 이 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법도 있습니다. 시장에서의 독점적 차별대우는 공정거래를 해치고 시장을 파괴합니다. 특허권자 기업이 대기업이거나 선발경쟁자라면 시장을 선점한 상태에서 특허로 이중 독점을 시도하기 때문에 후발경쟁자가 극심한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특허제도로부터 비롯된 차별 대우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한계가 바로 보호할 가치가 사라진 특허는 소멸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당 특허가 소멸되면 특허권자 기업과 경쟁자 기업의 분류도 소멸합니다. 특허가 소멸되면 누구나 자유롭게 그 기술을 이용할 수 있지요. 존속기간만료제도는 특허가 20년의 제한적인 소유권임을 원칙적으로 천명합니다. 등록료 미납 소멸제도는 특허제도와 시장을 밀접하게 연결합니다. 시장에서 망하면 자연스럽게 특허도 없어지도록 유도하여 특허제도를 보완했습니다. 2015년 현재 1,540,235건의 특허가 등록되었으나, 그 중 627,792건이 소멸되었습니다. 무려 40.8%에 이릅니다(특허청 2016년 지식재산백서 중). 이 두 가지 제도는 국가가 특허권자 기업의 독점을 제한하려는 조치입니다. 경쟁자 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조치할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특허무효 제도입니다.

하지만 경쟁자 기업에 의해서 무효가 되는 특허보다 특허권자 기업 스스로 포기하는 특허가 훨씬 많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특허권자 기업은 자기가 갖고 있는 특허를 포기할까요? 시장에서 망해서 특허를 관리할 역량을 잃었거나, 특허기술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겠죠.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누구도 특허경쟁력을 언급하지 않더군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특허가 그렇게 대규모로 소멸되는 만큼 기술 공유의 영역이 증가해서 시장과 산업에 이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술 공유의 영역은 무주공산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일어나지요. 새로운 기술혁신과 새로운 특허활동이 생깁니다.

다시 특허무효제도로 돌아와 봅시다. 보호할만한 가치가 없는 특허라면 특허권자 기업의 이익보다 경쟁자 기업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독점은 예외적인 것이고, 예외는 독창적이며 진보적인 기술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생긴 것인데, 그 예외 조항이 사라졌다면 그것을 무효로 정화시키는 것이 시장과 산업의 발전을 위해 타당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특허무효제도는 시장에서 비롯됩니다. 특허무효심판을 청구하기 전에 특허분쟁이 있었을 것이고, 특허분쟁이 벌어지려면 시장에서의 충돌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저는 그래서 특허무효는 특허제도에 대한 시장의 정화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등록료 불납 등에 의한 소멸도 마찬가지로 시장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고요.

이처럼 특허제도와 시장의 영향력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은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의 특허경쟁력이란 무엇일까요? 특허권이라는 결과로 특허경쟁력을 가늠하는 생각보다는, 특허활동을 통해서 기업의 혁신문화가 어떻게 자극되는지를 저는 중시합니다. 특허무효율이 이슈였으므로 일단은 여기까지만 답하겠습니다.

어쨌든 특허무효율이 50%를 상회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아니며, 더더욱 그 원인을 특허청의 부실 심사로 유추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 비약이며,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특허청의 부실 심사를 꼬집으려면 특허무효율이 아니라 거절결정에 대한 불복절차에서 취소되는 비율을 탐구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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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2

질문: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50%를 넘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심사를 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줬는데 그 중 절반이 무효가 된다면 이는 부실심사의 증거입니다. 한국의 특허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특허청의 이런 부실심사 행정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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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개념적으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의 관계와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의 관계는 다른 범주입니다. 전자는 제도와 제도를 비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합니다. 후자는 제도와 확률을 비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것부터 설명하지요.

국민(외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이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서 특허를 받으려면 국가기관에 특허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기관은 엄정하게 특허심사를 해서 과연 독점권을 줄 수 있는 아이디어인지를 심사합니다. 법률이 정한 절차와 내용에 따라서 심사를 행합니다. 심사는 사람이 합니다. 심사관이라는 직책을 지닌 공무원이 하죠. 그런데 아이디어는 물건이 아닙니다. 감각적으로 확인해서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규격이랄 게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무형이며 눈에 보이지 않고 그래서 심사가 기계적으로 행해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허심사는 국제주의를 취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지구 전체의 관점으로 새롭고 진보적인 발명만이 특허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요. 심사관은 신청된 아이디어가 과연 지구 전체의 관점에서 독창적인지를 심사해야 합니다. 법이 그렇게 규정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심사관은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알고 있으며 모든 정보와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가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넌센스죠.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신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특허제도는 그런 전혀 가능하지 않은 것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답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인간의 현실 사회에는 경험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사관은 선행기술을 조사해서 신청된 아이디어와 비교해야 합니다만, 산업을 선도하는 혁신적인 발명은 지구촌 일부 나라에 한정되어 있거든요. 언어처리 기술도 많이 발전했고요. 그래서 심사관은 몇몇 나라에 제한된 범위로 선행기술 조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칙에 의존해서 심사를 한다고 해서 완벽할 리는 없습니다. 공무원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도 당연히 특허심사에 개입하게 마련이고요.

그래서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특허무효 제도입니다. 국가기관의 공무원이 일차로 심사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혹시 특허권에 하자가 있는 경우에는 특허무효제도를 둬서 나중에라도 잘못된 특허를 없애도록 했습니다. 즉 특허무효는 특허심사를 보충해주는 의미이며, 아주 바람직한 제도이지요.

특허는 기술에 관한 것이고, 그 기술은 순수 학문적인 성과가 아니라 항상 시장에서의 활용을 염두에 둔 기술입니다. 시장활동이 없는 특허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시장이 없으면 특허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략 맞는 생각입니다. 시장이 소멸했다거나 시장에서 패퇴한 경쟁자의 특허는 어찌 되겠습니까? 보통은 특허도 소멸됩니다. 이것도 일종의 경험칙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자 있는 특허라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자 있는 특허가 문제가 돼서 정말 무효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그 특허와 관련된 시장이 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권리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있을 것이며, 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기업)들이 서로 싸우면서 특허무효를 다투게 한다면 좀더 낫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시장이 특허행정을 보충합니다. 그것이 특허무효 제도의 자연스러운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의 관계는 법제도 관점에서나 현실 시장의 관점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무효제도는 심사제도를 보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무효제도를 통해서 하자 있는 특허를 없애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애당초 하자 있는 특허가 없도록 심사하면 되지 않겠냐고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공무원은 신이 아닙니다. 국제주의를 택한 특허심사제도에 부합하지 않은 발상입니다. 공무원 개개인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주면 필경 부작용이 따릅니다. 대부분의 하자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당사자에 의해서 발견되고 주장되는 것이지 국가기관의 의무가 아니라는 점, 무효특허의 출현이 시장과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 국가행정 기관이 완벽한 심사를 추구하면 공무원의 실적부담을 증가시키며 주관성을 강화시킨다는 점, 이는 발명공개에 대한 대가로서 특허처분으로 산업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기보다는 거절처분의 남용으로 특허행정을 규제행정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점, 결과적으로 특허제도가 혁신을 촉진하기보다는 가로막는 제도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골고루 생각해야 합니다.

특허심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무효율을 떨어트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특허법의 목적은 특허제도를 통해서 발명의 보호장려, 기술의 누진적 발전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허심사의 목적도 특허법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공무원은 대법관이 아닙니다. 발명의 보호 장려와 산업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제도 취지에 맞게 엄정한 심사를 하면 충분합니다. 애당초 하자가 없도록 심사를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심사해서 권리를 부여한 100건의 특허에 대해서 한두 건의 특허가 나중에 무효가 되었고, 그 이유가 당사자의 공방을 통해서 전혀 다른 증거로 무효가 되었다면 그 공무원을 탓할 수 없습니다. 행정처분에 의해서 누군가 피해를 본 것도 아니며, 혹시라도 있을 피해는 법원의 판결과 시장 경쟁력에 의해서 보상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발명에 대해서 엄격한 심사라는 미명으로 간단히 거절하고 그것이 법원절차에서 뒤집어졌다면 그 공무원의 거절처분으로 특허출원인을 피해를 입게 됩니다. 대개 대기업은 괜찮지만 중소기업이나 개인의 경우, 공연한 시간과 비용의 낭비로 시장에서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국가기관의 행정은 이런 파급력을 형량해야 합니다.

물론 엄격한 심사를 해서 특허취득율 자체를 떨어트리면 특허무효율도 낮아질 수도 있겠지요. 논리적으로는 무효의 대상이 절대적인 양이 적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권리의 하자는 공무원이 찾는 게 아닙니다. 특허분쟁이 있는 곳에 특허무효가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허의 권리존속기간은 20년이어서 과거의 특허가 분쟁에 사용될 수 있고요.

행정기관은 법률의 규정을 실행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장에서 발생되는 모든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특허심사는 행정기관에 전속합니다(물론 행정불복절차가 있습니다). 반면 특허무효는 시장에서 비롯되고(시장이 없는 곳에서 는 특허무효가 청구되지 않습니다), 무효율은 당사자가 쟁송절차에서 제출한 주장과 증거, 소송행위 등에 의해서 결정될 뿐입니다. 심사를 아주 잘했으나 특허가 무효될 수 있고, 심사를 아주 못했으나 그 특허가 무효의 대상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자가 있는 특허이지만 무효쟁송과정에서 그 하자에 부합하는 주장이나 증거가 제출되지 못한다면 유효한 특허입니다.

그러므로 “특허청의 심사행정과 특허무효율은 관련이 거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도 상관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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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1

질문: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50%를 넘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심사를 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줬는데 그 중 절반이 무효가 된다면 이는 부실심사의 증거입니다. 한국의 특허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특허청의 이런 부실심사 행정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흔한 오해에 관해서 질문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째 한국 특허무효율은 그다지 높지 않고 적정한 수치를 보여줍니다. 둘째 특허청의 심사행정과 특허무효율은 관련이 거의 없습니다. 셋째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도 상관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결론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좀더 높은 구릉에서 국가의 특허정책과 기업의 특허전략을 전망할 수 있게 됩니다. 통계 저 너머의 먼 곳까지 바라볼 시야를 얻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특허무효율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찾지는 못했습니다만, 특허청에 관한 국정감사 뉴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허심판원에서 무효가 되는 비율은 최근 5년간 평균 50.5%라는 것입니다.[1] 다른 통계도 확인해 보았는데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대략 10건의 특허에 대해서 무효심판을 청구하면 5건은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두 건 중 한 건의 특허가 무효가 됩니다. 여기서 잠시만, 성급하게 어떤 판단을 내리지는 말고 주위를 둘러 봅시다. 독일의 특허무효율은 일부 무효를 포함해서 2000년에서 2012년까지 75%였으며, 2010년에서 2012년에서는 78%였다고 합니다.[2] 미국의 특허무효율도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소프트웨어와 비즈니스 모델 분야의 무효심판사건의 경우 무효율이80%를 넘습니다.[3] 그러니까 한국 특허무효율이 50%에 이른다고 해서 한국만의 특이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계는 참 편리하지만 편리한 만큼 사람의 생각을 게으르게 만들곤 합니다. 통계특정 변수만을 숫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다양한 현실 변수가 고려되지 않는데, 그 숫자가 주는 메시지가 강한 나머지 더 깊은 생각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특허무효율이 나타내지 못한 현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특허무효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돼야 합니다. 주장과 증거입니다. 첫째 특허무효를 ‘공식적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행정심판을 청구합니다. 즉, 심판청구의 당사자가 필요합니다. 자기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데 그냥 특허무효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특허침해 문제가 있으니까 특허무효도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50%에 이르는 특허무효율은 한 해 등록된 10만 건의 특허 중 5만 건의 특허가 무효가 될 것이라는 징표가 아닙니다. 10만 건의 특허 중,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5000건 정도의 특허만이 분쟁과 관련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요. 그러니까 특허무효율이라는 것은 아무리 최대로 잡아 봐야 5000건 중 2500건이 무효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이야기랍니다. 특허분쟁과 관련된 5000건의 특허에 대해 모두 무효심판이 청구되지는 않습니다. 승소가능성이 분석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가 개입합니다. 내부 논의도 할 것이고요. 요컨대 사전 검열을 통과해야 합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전에 특허무효분석을 합니다. 이런 분석은 법리와 증거를 찾아서 행해지는데,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소송은 법적인 논리와 증거에 의해서 승패가 갈립니다. 무작정 무효심판을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승패를 따져 본다는 말입니다. 질 것 같으면 무효심판을 청구하지 않습니다. 이길 것 같으니까 변리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전략을 짜서 무효심판을 청구하는 것 아닐까요? 쉽게 설명하자면 5000건 중 예컨대 2000건만 실제로 무효심판이 청구된다는 말입니다(물론 더 적을 수도 있고 더 많을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가정해 보죠). 또한 무효심판 청구된다고 해서 모두 심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중 상당수가 취하되거나 각하됩니다. 그 비율이 상당합니다. 2015년 특허청 무효심판 통계 중 1470건(같은 해 일본은 215건에 불과)의 심판처리 중 527건만이 제대로 심리되었고 나머지는 취하, 각하, 무효처분되었습니다. 그리고 527건 중 348건이 무효심판절차에서 무효가 되었습니다(일부 무효 포함, 특허법원/대법원 판결결과는 생략). [4]

이제 우리는 50%의 특허무효율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정심판을 청구한 그 2000건의 특허 중 고작 수백 건의 특허가 무효가 될 수 있음을 뜻하고, 그렇다면 특허무효율은 10만 건의 특허 중 수백 건의 특허만이 무효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는 다양하게 변조되기도 합니다. 특허무효를 기대하면서 무효심판을 청구했는데 그 중 절반밖에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째서 이길 가능성이 절반밖에 되지 않을까요? 충분히 논리도 준비했고 좋은 증거도 제출했는데 말이죠. 까닭은 간단합니다. 상대방이 있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도 최선을 다합니다. 특허권자는 특허무효를 주장하는 상대방의 펀치를 맞고만 있지는 않거든요. 반론을 제기하고 증거를 공격합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고 싸워서 50%의 승률입니다.

무효심판은 마치 기습적으로 먼저 선제공격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허무효싸움을 개시하는 것도, 무슨 주장을 하고 어떤 증거를 제출할지에 대한 정함도 모두 특허무효를 주장하는 측에서 정합니다. 준비를 꼼꼼히 한 다음에 느닷없이 특허무효전쟁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50%의 승률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특허무효율이 50%라는 통계에서 아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증거조차 없는 강력한 특허는 무효심판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특허무효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특허 무효심판을 제기했다면 반반의 성공률입니다. 운이 좋으면 소송을 이깁니다. 물론 뛰어난 전략, 빼어난 증거, 탁월한 분쟁수행도 중요하겠죠. 그런 역량을 가진 변리사와의 소송수행은 승패에 당연히 영향을 미칩니다. 최고의 변리사끼리의 공방은 볼만하겠지요. 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장면은 드뭅니다.

이로써 앞에서 제기한 첫 번째 저의 결론, <한국의 특허무효율은 그다지 높지 않고 적정한 수치를 보여준다>라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전해졌으리라 기대합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특허청의 심사행정과 특허무효율은 과연 관련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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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허청, 고질적 부실심사 개선해야>, 아시아뉴스통신, 2016. 9. 22. (https://goo.gl/E1ihXf)

[2] Joachim Henkel, Hans Zischka, , 2015. 3. 24.

[3] Robert R. Sachs, , 2015. 6. 20. https://goo.gl/NxPlTZ

[4] 중 152면, 특허청, 2016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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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지식의 시대

(지식과 창의성에 관한 연재)

1. 앎은 우리 인간을 개선한다. 우리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지식의 시대에 살았다. 더 나은 지식을 위해서 우리는 다양하게 경험하고 여러 가지 것을 공부한다. 지식 없는 지혜는 공허하다. 그러므로 지혜에 대한 사랑, 즉 모든 철학과 사상은 결국 지식에 관한 애착을 동반했다.

권력 2. 그러나 지식은 권력지향적이었다. 왕족이나 귀족, 여하한의 지배계급, 성직자, 크게 성공한 상인들은 지식을 독점하였다. 더 많은 지식이 더 큰 권력을 뜻했다. 피지배층에 속한 사람도 지식을 취할 수 있겠으나 드물었다. 피지배층의 대중은 지식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식을 취하자마자 권력지향적으로 변모한다.

시간 3. 역사를 한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시간은 결국 민중의 편이라고 생각하겠으나 개념 속의 민중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민중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개 시간은 권력자의 편이었다. 지배계급은 기다리지 않고 지식을 향유했으나 피지배계급은 수많은 세대에 걸쳐 기다려야 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기다림을 모른다. 당대의 사람도 그 기다림을 모른다. 후대는 당대의 개인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당대는 미래의 변화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과 노동 이외의 지식이 피지배층에게 퍼지기까지 수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4. 지식은 거래된다. 단지 이 거래가 물물교환이나 화폐거래와 달라서 주고받음이 동일 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책, 교사,공부할 수 있는 시간,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등을 구해야 하며, 관심과 의지를 지불해야 한다.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피지배층 사람들은 그런 부담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당연히 권력에서 배제된다.

구텐베르크 5. 15세기에 혁명이 일어났다. 활판인쇄술의 발명과 보급이다. 지식의 보급과 전파를 위한 수단은 고대에도 있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위대함은 가격파괴의 혁신이었다. 30평 아파트 한 채 가격이 100만원이고, 신제품 아이맥 컴퓨터가 100원이라면, 사회가 격변할 수밖에 없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유럽 사회에 전속력으로 퍼졌고 수많은 사람이 새롭게 지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지식의 독점, 예컨대 성서의 독점, 철학의 독점, 문학의 독점, 과학의 독점, 기술의 독점이 종말을 고했다. 사람들은 지식을 취하자마자 권력지향적으로 변모했으며, 정치와 종교는 혁명전야를 맞이했다.

조선 6. 인쇄술은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다. 일본은 서양과의 교역으로 16세기말에 서양의 인쇄술을 가져왔다. 조선이 취한 지식과 일본이 취한 지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과학과 철학 7. 과학과 철학은 가장 큰 지식이었다. 지식은 이성을 자극하고 새로운 개선을 낳는다. 서양의 과학은 인쇄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쿠페르니쿠스도, 뉴턴도 없다. 지식이 퍼지면서 여러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자극한다. 종교적 신념은 지식 전파의 가장 큰 적이었다. 동시대에 모든 종류의 우상과 싸우는 철학이 함께 발전한 것은 과학에게는 다행이었다. 철학에 의해서 종교의 권위가 충분히 논박 당하고 자유사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과학의 발전은 속력을 내었다. 철학이 우상의 권위를 해체하자 과학은 세계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시점도 19세기 중반이다.

자본주의 8. 자본주의는 지식을 산업화하였다. 지구상의 모든 종류의 지식을 탐색하여 상품화하였다. 자본주의는 자원을 상품화하였다. 총과 포가 동원되었다. 제국과 식민은 자원의 상품화를 구조화하였다. 약탈적인 거래든 공평한 거래든 모든 종류의 거래에는 주고받음이 있다. 제국주의의 약탈은 역설적이게도 식민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파하였다. 지식이 전파되면 권력의지를 낳는다. 지식을 독점한 자들은 더 크고 영속적인 권력을 욕망한다. 전쟁과 학살이 지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면서 20세기는 인간의 광기를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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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지식의 종말

제3편 창의성의 비밀

 

생애 두 번째 주례사

 

지난 5월, 내 인생 두 번째 주례를 맡았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행복한 인생을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주례로서 After Service 제공합니다(-.-)

주례사

—– 종로 수송동 85번지에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그 카페에는 손님들에게 아침을 전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그 청년의 아침인사 레시피는 이러했습니다. 눈빛을 마주치기, 웃음을 전하기, 커피를 내려주고, 하루를 축복하기. 지금 그 청년이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85번지 3층에는 특허사무소 임앤정이라는 회사가 있고 그 회사에는 미인이 한 명 있습니다. 낙관적인 그녀가 매일 아침 1층 카페이 들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남자가 들이키는 실내공기가 달라졌을 터입니다. 그 미인이 그 청년과 함께 여러분 앞에 서 있씁니다. 신랑 남윤준군, 신부 구혜미양,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양가의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하객을 대신하여, 이제부터 주례는 인생의 선배로서, 또한 두 분의 인연에 조금이나마 기여한 85번지 사람으로서 짧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신랑 남윤준군 신부 구혜미양, 인생을 쿨하게 사십시오. 인생의 팔 할은 운입니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운 덕분이요 운 탓입니다. 꿈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패가 익숙하게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낙담하지 마십시오. 책망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저 재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운을 탓하면서 계속 성실하게 사십시오. 누구든지 넘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서로 손을 내미십시오.

때때로 이른 시간에 성공과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겠지요. 그러나 우쭐대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탁월한 능력과 재능, 매력과 미모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요행덕분입니다. 성공할 때 그 공을 행운으로 돌리면 더 좋은 행운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고 따뜻하게 살아가십시오.

신랑 남윤준군 신부 구혜미양, 낮은 수준으로 사랑하지 마십시오. 결혼이 연애와 다른 것은 감정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감정은 휘발됩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감정이 식었을 때 사랑을 비추는 촛불은 꺼집니다. 그러나 알몸의 감정에 옷을 입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으로 충만한 사랑을 하십시오. 그것은 의무와 의지를 낳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비추는 더 밝은 등불이 켜집니다. 해야만 하니까 하는 것, 그것이 위대한 사랑입니다.

신부 구혜미양 남편을 충만케 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신랑 남윤준군 아내를 빛내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그녀를 기쁘게 하시고 그를 행복하게 하십시오.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부부로서의 의무입니다. 사랑은 연약해서 의무로부터 비롯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칸트 할아버지는 그것을 실천이성이라고 불렀답니다.

신랑 남윤준군, 아내의 아침을 사랑하십시오. 눈빛을 마주치기, 웃음을 전하기, 커피를 내려주고, 하루를 축복하기. 신부 구혜미양, 남편의 밤을 낙관적으로 사랑하십시오. 두 사람은 이제 침범할 수 없는 부부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당신들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멀리 뉴질랜드에서 신부의 친구, Miss Diana가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Welcome! 그녀를 위해서 본 주례사를 영어 한 문장으로 요약하겠습니다.

“Life is fortune, Love is Duty”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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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표현

사람은 생각하면서 성장한다. 성장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각은 무엇인가? 국어 사전에는 헤아림, 판단, 인식, 정신, 관심, 상상, 마음, 의견 따위의 낱말이 함께 제시되고 있다. 이런 낱말들의 모여서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생각이다. 그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반응이며 파동이다. 사람은 세상에 반응하고 진동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그치면 어딘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한줌의 생각은 지니고 다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의 분량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표현이다. 표현은 생각에 형체를 준다. 표현은 생각에 호흡을 주며 그것을 유기적으로 만들다. 생각은 표현을 만남으로써 생명을 갖는다. 이제 생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생명력이 있는 생각과 무생명의 생각.

표현하지 않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다. 잠시 반응하고 잠시 진동하다가 어딘가로 발산하고 만다. 어딘가의 차원으로 휘발되고 사라진다. 생각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야 한다. 당신은 두 가지의 표현 양식을 갖고 있다. 언어로 표현하든, 행동으로 표현하든, 생각하거든 표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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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놀이

며칠 전부터 아이들과 언어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이 언어놀이는  간단하고,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그런 말장난이다. 우리끼리 은밀하게 속삭이면서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은 언어의 의미 조작에 관한 것이고, 새로운 의미쌍을 만드는 일이다. 말하자면 암호 놀이다. 이를테면 (사랑 = 달님), (좋아 = 별님), (나빠 = 나비), (정리하기 = 푸른 하늘(아들의 경우)), (정리하기 = 예쁜 강물(딸의 경우)), (짜증났어 = 코뿔소), (너무 화가 났어 = 멧돼지), (책을 읽어주기 = 나뭇잎), (잠을 자자 = 스시) 따위.

  • 우리끼리만 아는 의미여서 “하나애 달님!”, “세린아, 푸른 하늘 해라”, “아빠, 나뭇잎!”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키득대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 은밀하다. 그래서 게임을 하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태초부터 엉터리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제격의 재미.
  • 긍정적인 의미의 암호는 웃음을 짓게 만들고 부정적인 의미의 암호는 덜 감정적이게 만든다.
  • 언어약속을 통해서 관계가 더 강하게 이어진다. 하긴 인간사 대부분의 관계는 언어로 이어지게 마련
  • 언어는 모든 지식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식은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언어놀이는 은연 중에 지식 습득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인 ‘언어약속'(그것을 ‘개념’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에 익숙하게 해준다.
  • 언어의 사회성을 체감한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을 체험하는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탐험해 볼만한 무엇인가가 있다. 이런 언어놀이를 좀 더 해 볼 작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 낱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기존에 없던 낱말을 만들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말놀이도 해볼까 한다. 육아는 말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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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어린이철학강의

철학은 개념학문이다. 아니, 모든 학문은 개념학문이다. 개념은 개념어, 낱말에서 시작한다. 그 낱말의 의미를 외우기는커녕 먼저 이해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태도가 철학을, 아니 학문을 어렵게 만든다. 암기보다는 원리를 탐구하는 태도는 멋져 보이지만, 비상한 두뇌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아이들이 <개념>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무엇보다 암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암기를 잘하기 위해 요령을 찾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원리도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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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에 관하여>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약속해. 그리고 약속을 지키면서 서로 사귀고 배우고 자라지. 약속 없으면 친구 없지. 약속을 무시하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약속을 하면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어요. 그런데 누군가 약속을 어기면 화가 나잖니. 미워하면 사랑이 죽어요. 화를 내면 우정이 자랄 수 없지. 그래서 약속을 안 지키면 친구들이 싫어하고 선생님이 걱정해.

도로에는 차가 많고 서로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아무 문제가 없어. 왜 그럴까? 운전하는 사람들이 서로 약속을 지키면서 운전하기 때문이야. 반대방향으로 달리지 않겠다는 약속, 서로 때리거나 무섭게 굴지 않겠다는 약속, 신호를 지키겠다는 약속.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니. 그래 이 세상은 사고투성이가 되겠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 “약속을 배우기.” 따라해 봐. 그래 “약속을 배우기.” 새끼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만 약속이 아니란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그 자체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지. 예를 들어서 수학은 약속의 학문이야. 뭐라고? “수학은 약속의 학문.” 1, 2, 3, 4, 5 라는 숫자를 ‘일, 이, 삼, 사, 오’라고 읽는 것도, 덧셈과 뺄셈을 하는 방법도, 이것을 사각형, 저것을 삼각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두 약속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 스승들이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수학 문제는 얘들이 약속을 잘 알고 있나 한 번 알아보는 거지.

너희들도 약속을 이용해서 수학 문제를 만들어 낼 수는 있어. 퀴즈처럼 말이야. 하지만 다른 친구들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약속이어야 해. 더하기나 빼기 대신에 수학시간에 <쏼라쏼아 뾰로둥 통통 쾅쾅쾅>을 배우자고 말하면 친구들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지 않겠어? 친구한테 ‘혜리야 내가 내일 별을 따 줄게’라거나, 피아노를 잘 못치면서 ‘친구여러분, 내일까지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을 마스터하게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약속이 아니야. 장난이지. 뭐라고? 그래, 장난. 약속은 장난이 아니야. 진지한 거야.

그런데 약속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그래, 그 약속을 기억해야지. 내일 아침 10시에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으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잘 기억해야 해. 까먹으면 약속을 못 지키니까.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공부를 하다 보면 책에 적혀 있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약속들이 많아요. 어떤 단어의 뜻이라든가 수학 규칙 같은 거. 그것이 왜 그럴까라는 이유는 몰라도 돼. 일단 잘 기억해야 해. 외워야 해. 외워서 잊지 않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해. 그래야만 약속을 지킬 수 있으니까.

학교에서 뭔가를 배우고 집에 와서 복습하는 까닭은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야. 잊지 않으려고. 뭐라고? 그래, 잊지 않으려고. 우리 인간은 자꾸 까먹잖니. 기억은 매우 연약해서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버리거든. 자주 관심을 보여줘야 해. 그게 공부하는 이유야.

어린이들은 앞으로 새로운 낱말들을 계속 배우게 돼. 그 낱말마다 뜻이 정해져 있어. 그 뜻이 바로 약속이야. 단어를 배우면 그 단어를 뜻과 함께 외우기. 약속이니까. 그렇지만 당연히 까먹겠지? 괜찮아, 다시 외우는 거지. 또 잊어버리겠지? 괜찮아. 또 외우면 되지. 얘들아 이러다 보면 아주 신기한 일이 생긴단다. 어느날 갑자기 그냥 알게 돼. 어느날 갑자기 한글을 알고 또 어느날 갑자기 덧셈과 뺄셈을 알고, 또 어느날 갑자기 그보다 훨씬 어려운 것도 깨닫고 누군가에게 쉽게 가르쳐줄 수도 있어. 아빠처럼. 아빠도 너희처럼 공부했어. 엄마도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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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선행학습 시키지 않는 이유

내가 아이들을 선행학습 시키지 않는 이유

나는 학습성과가 아니라 공부하는 자세를 중시한다. 뛰어난 성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염치와 교양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공통감각으로 분개한다. 나는 내 아이가 남한테 욕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부보다는 공부하는 자세를 익혀서 손해 볼 일이 없다. 공부하는 자세를 익혀서 만약 성적이 좋다면 질투와 시기를 피해갈 수 있다. 인성은 배우려는 자세에서 만개하기 때문이다. 만약 성적이 좋지 못하다면 타인을 더 빨리 인정하여 관계를 보전하며 그러면서 자기 때를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사십 대 중반이 되면 성적표를 볼 일이 없다. 누구도 공부를 측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나이에 이르러도 공부는 한다. 경험, 관계, 책, 일, 대화, 뉴스 등을 통해서 공부를 한다. 이 경우 공부하는 자세가 어려서부터 몸에 배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다. 배우기보다는 남을 가르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생을 다 산 것이다. 여생은 긴데 수명은 다하고 말았다. 나는 내 아이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아이의 중년을 생각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어떤가?

공부는 타인에 대한 인정(認定)에서 시작한다. 타인을 인정할 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동료를 인정함으로써 동료에게 경쟁심을 갖기보다는 그/그녀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다. 선행학습을 하면 동료를 인정하기보다 경쟁심을 부추길 수 있다. 선행학습으로 말미암아 동료보다 자기가 똑똑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적 수준으로는 동료를 내려다 볼 염려가 있다. 학생은 자기를 가르치는 교사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선행학습을 하면 자기가 이미 다 아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로 하여금 교사에 대한 존경을 방해한다. 만약 교사의 방식이 학원의 방식보다 요령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면(-많은 경우 그럴 수 있다), 교사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그럴 때마다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낮 시간은 저녁 시간보다 길다. 그러므로 종국에는 선행학습 없이 공부하는 학생과 비교할 때 집중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내가 아이들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우선 친구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경쟁상대가 아니며, 당연하게도 자기 자신보다 똑똑하므로 일시적인 뒤처짐 때문에 비관하지도 않는다. 또한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를 할 기회는 학교밖에 없으므로 남보다 훨씬 수업시간에 집중한다. 집중이 습관이 되고 배우는 힘이 생긴다. 성적이 좋지 못하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성적이 좋으면 남보다 크게 칭찬하고 크게 기뻐할 수 있어서 좋다. 아이나 부모나 성적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인간은 공부하면서 자기가 배운 것을 범주화해서 추상화하고 일반화한다. 그것이 지식이 된다.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작업에는 지적인 능력이 발휘되어야 하며, 꽤나 시간이 걸린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아니다. 자식의 두뇌와 부모의 두뇌 혹은 교사의 두뇌를 클라우드 방식으로 연결할 수 없다. 스스로 지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하는 것이 자기 주도 학습의 지향점일 터다. 그런데 선행학습은 자기 스스로가 아니다. 아이의 천성과 성장속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속성으로 어른들이 정리해 놓은 요령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다.

이런 선행학습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인정과 그 인정으로부터 비롯되는 즐거운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에 별로 성과가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스스로 범주화하고 스스로 추론하고 일반화하면서 깨우치는 공부의 즐거움을 훼방 놓는다. 아이에게서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을 빼앗지 말자. 선행학습은 자기 아이의 자발적인 지적 능력의 발현을 부모가 방해하는 셈이다.

만약 십 년이 넘게 지속한 선행학습을 통해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면 아마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서도 아이가 그런 일을 해냈을 것이다. 부모의 환상만이 선행학습의 장점을 믿게 할 뿐이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경쟁의 우위를 점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아이 스스로 그런 환경을 만들도록 기다리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이들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아이가 어려워하는 문제를 가르쳐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이어야 하며, 이 준칙은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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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소수견해4

소녀상 이전의 문제에 대하여:

한국측 표명사항 1은 일본 정부의 표명사항을 받아주면서, 바로 위에서 살펴본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따로 중복해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한국측 표명사항 2가 중요합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이전에 관한 문제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본 외상이 소녀상 이전이 합의되었다고 일본 언론에 말하고, 한국 외교장관은 그렇지 않다고 한국 언론에 말하는 상황 같습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 2.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 2.韓国政府は,日本政府が在韓国日本大使館前の少女像に対し,公館の安寧・威厳の維持の観点から懸念していることを認知し,韓国政府としても,可能な対応方向について関連団体との協議を行う等を通じて,適切に解決されるよう努力する。

한국측 표명사항 중에서, 파란색 부분인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은 제삼자 관점에서 보자면 합리적이며 무리는 아닙니다. 어쨌든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경찰들이 항상 상주하며 대사관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가, 그 주된 원인이 소녀상이 그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주재국가 정부에 그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점>을 전달할 수는 있습니다(아마 매우 많이 전달했을 터입니다). 외교관례 관점입니다. 또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국정부는 대응 조치로서, “관련 단체(정대협등)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라고 표현되어 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소녀상 이전을 정부가 확정적으로 강행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아닙니다.

공식적인 워딩이야 어찌되었든,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아마도 소녀상 이전을 원할 것입니다. 당국자들은 그렇게 합의했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하지만 함부로 이전하지 못합니다. 소녀상의 설치는 사실상 한국정부가 방치하고 묵인한 것인데다가, 이미 그것이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고 있고, 그런 상징이 국민들의 마음 속에 상당히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느닷없이 철거하거나 이전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음모설) 그래서 아마 누군가는 작전을 수립했으리라 봅니다. 소설입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위안부 운동의 이미지 희석화>입니다. 위안부 문제의 민족적 관점을 해체하고 진영대립의 관점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주도하는 시민단체를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아니라 좌파를 대표할 뿐이며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으로 만드는 작전이랄까요. 종북 금기신앙을 이용해서 친일 금기신앙을 덧칠 할 수도 있습니다. 종북 하면 보수 단체가 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마부대, 어버이연합이 출현했습니다. 앞으로 자주 나타날 것이며, TV 토론 같은 인위적인 공론 만들기 형태도 보일 것이며, 또 다른 보수단체도 소녀상 앞에서 소녀상 이전 데모를 하지 않을까 전망합니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현재 일본대사관 공사중입니다. 공사 규모 현장을 가렸습니다만, 그 규모를 볼 때 신축공사입니다. 일본대사관이 완공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녀상 이전 작전은 일본대사관 완공에 소요되는 시간 동안에 충분히 실행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매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녀상 지키기 농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정부가 철거/이전을 강행하더라도 그 시점은 지금은 전혀 아닐 터입니다.

소설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나는 정부가 소녀상을 강제로 철거/이전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것은 쓸데없이 국민감정을 폭발시키며 대립을 심화하고 공론을 파괴하며, 친일 금기신앙을 강화해주기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소녀상 이전에 대해서 반대 견해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대합니다.

자, 그런데 말이죠.

소녀상이 그 위치에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하나요?

정말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태고적부터 상징물을 만들기를 좋아했습니다. 상징은 신앙이 되며 전승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소녀상 조형물을 만들어서 설치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 인간 본성에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정치적 상징물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성도 매우 좋습니다.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시민단체와 정당들은 정치적 해결을 지향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 대사관 앞에 놓여 있어야 하는 필연성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매주 수요집회에서 어린 중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거기서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때때로 퍼포먼스를 하면서 적의와 증오를 익힙니다. 역사문제를 해결하고 잊지 않으려는 까닭은 적대감을 새기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본대사관과 소녀상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이는 과거문제로부터 비롯된 대립을 지속적으로 현재화해서 적대감을 강화한다는 관점에서만 어울립니다.

우리가 위안분 문제로 애통해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역사를 통해 배운다면,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고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민간인, 특히 여성의 인생이 참혹해질 위험에 곧바로 노출됩니다. 위안부 문제에서 전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평화의 관점에서만, IS에게 납치되어 성노예의 비참함을 겪고 있는 야지디족 소녀들과, 일제 시대 조선인 위안부와, 한국군이 직접 관여한 베트남전 위안부 혹은 미군 위안부 사이의 공통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관점에서는 일본대사관과 소녀상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소녀상은 조형물에 불과하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매주 수요일, 마치 종교의식처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정부를 비토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형태는 평화시위이지만 구호는 적대감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수견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강제로 철거/이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모든 내용에는 그것에 어울리는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만사 그렇습니다만,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논의, 사람들의 공론이 평화롭게 우후죽순으로 자라나서 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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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밑줄2

작년 11월말에 출간된 <목돈사회>(대한믹국은 어떻게 헬조선이 되었는가, 에이콘출판사)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독자 자체가 소수라는 점이 함정. 친분이 있는 몇몇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책을 보냈으나 피드백이 없다. 오히려 평범한 시민들은 확실한 피드백을 보여줬다. 앞으로 책을 출간하면 언필칭 정치인, 지식인, 활동가들에게는 선물하지 않을 작정이다. 남들이 읽기 시작하면 그들도 읽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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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목돈사회> 2장이다. 2장은 목돈사회를 조장한 가장 큰 문제는 주거보증금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 책의 내용적인 하이라이트이다. 그래서 <저자의밑줄> 한 번으로 제2장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저작물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2장의 일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천문학적인 지하경제>. 여기에서는 주거보증금이 어째서 지하경제를 구성하는지 설명하고, 주거보증금 통계의 문제와 개선방법에 대해서 설명한다.

 

<주거보증금이 해로운 여섯 가지 이유>는 정말 재미있는 곳이다. 저자로서 책도 아닌 곳에서 여섯 가지 이유를 정리해서 공개하는 것은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어서(-.-) 극히 일부 표현만을 여기 옮긴다. 전세 제도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주거보증금의 성격,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매우 디테일하게 설명했다. 독자는 이곳에서 저자의 주장에 설득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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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구매 루트는 아래의 링크에서:

http://www.acornpub.co.kr/book/mok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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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소수견해 3

일본정부 표명사항 세 번째에 대한 소수견해를 밝힙니다. 먼저, 이 글의 독자 중에서 다음 세 분류의 사람들은 아예 읽지 않으실 것을 권합니다. 그 분들은 시대를 잘못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가 아니라 옛날이었다면 영웅호걸이 되었을 터입니다.

첫째, 민족이라는 집단감정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은 제 글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력(Understanding)으로는, IS에게 납치되어 성노예의 비참함을 겪고 있는 야지디족 소녀들과, 일제 시대 조선인 위안부와, 한국군이 직접 관여한 베트남전 위안부 혹은 미군 위안부 사이의 공통점을 알지 못하거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국정교과서에 대해서는 국가가 역사를 독점한다고 강렬하게 반발하면서 정작 자기 생각과는 다른 역사관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서슴 없이 저주하는 사람들은 제 글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보통 사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능지처참과 부관참시를 쉽게 말하게 마련입니다.

셋째, 초능력자는 제 글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글을 읽지 않아도 그 글의 주제와 메시지를 파악하고, 염력만으로 진심을 알아채며, 책을 읽지 않아도 이미 그 책의 문제점을 간파하는 초능력자는 제 글을 읽는 시간에 어서 더 큰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일본정부 표명사항 중 세 번째 단락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실무적이며 실효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지의 과잉이며 해프닝입니다. 그러나 양국 정부 수반과 실무자들의 본심이 여기에서 너무나 여실히 드러나 있어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단락의 표현에 의해서, (아마도) 대다수 일본인은 승리감을 체험하는 반면, 대다수 한국인으로 하여금 분노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이번 정부간 합의의 블랙홀이기도 합니다. 긍정성을 다 빨아들입니다.

  • 일본 정부는 이상을 표명함과 함께, 이상 말씀드린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
  • 日本政府は上記を表明するとともに,上記2の措置を着実に実施するとの前提で,今回の発表により,この問題が最終的かつ不可逆的に解決されることを確認する。あわせて,日本政府は,韓国政府と共に,今後,国連等国際社会において,本問題について互いに非難・批判することは控える。

 

이 단락은 그저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는 어구만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고려할 때, 대단한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과격한 어구를 정부간 합의사항으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사용했습니다. 뭔가 예상된 반발보다 더 큰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1번과 2번에 기재된 내용으로 분석해 볼 때, 협상 실무자들이 매우 탁월한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번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는 표현이 극히 부자연스럽습니다.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아마도 실무자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랬을까요?

일종의 음모설이 채용됩니다. 양국 정부에 대한 ‘Final하며 Irrreversible한 해결을 요구하는 미국 정부의 압력’을 상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가정적인 음모설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미국정부는 일본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셈이기는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밝힙니다. 나는 이 세 번째 단락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역사문제에 관한 한 정부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부작용만 생깁니다. 역사는 오직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만 청산되고 정리될 뿐입니다. 국가주의자들은 국가 주도의 완벽하고 반듯한 해결을 선호하겠으나, 이에 반발하는 자극적인 집단감정을 체험할 것입니다. 또 그런 방법은 대의명분만 찾는 관성을 낳지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인도적 해결에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역사문제에 관한한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단락의 메시지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여서 그저 해프닝처럼 보입니다. 다만, 국가간 역사문제 해결에 관련해서 국가의 한계를 밝히는 작업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해결을 선언했으므로, 이 선언을 각하하거나 기각하기 위해서는, 역사문제에 관한 국가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역사를 바라보는 저의 관점을 밝힙니다. 관점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좀 깁니다. 끈기가 필요합니다. 역사문제를 중시하는 분들이라면 이 정도의 끈기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1. 나는 역사문제를 이런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 (1) 과거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건은 과거에 관한 것이며,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어떤 사실은 ‘문제’가 됩니다. 그 사실이 ‘해결’되어야 했는데 미결되어 현재까지 이르며, 동시에 관련된 ‘사람’이 있는 경우에 그러합니다. 역사적 사건 또한 ‘해결’ 혹은 ‘미결’이라는 관점에 의해서 과거에 속하지만 현재에도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 (2) 목소리 큰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Fact’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기록과 기억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기록과 기억조차 과거의 사실을 온전히 전할 수 없습니다. 기록과 기억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사라짐에 따라 관련 사실이 사라지며 그만큼 역사적 사실은 파편화됩니다. 사라지는 기억에 의해서도 사실이 흩어집니다. 잘못된 기록과 가공된 기억에 의해서 사실이 재창조되기도 합니다. 또한 해석자에 의해서 편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과거의 사실은, 어떤 시점과 공간에서 ‘있었던’ 사실의 일부이며, 또한 파편화된 사실과, 각색된 사실과, 심지어 해석자의 편집의지까지 혼합된 과거입니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3) 이런 사정을 충분히 고려할 때,

과거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해석자의 주관일 뿐입니다. 해석자들은 남녀노소 많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인식하고 이해함에 있어 다양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정교과서> 논란이 웃긴 것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역사는 해석자의 견해에 의해서 비로소 실존합니다. 해석자가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집니다.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역사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역사문제는 필연적으로 해석자의 입장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작업에 의존합니다.

  • (4) 해석자의 주관은 개인의 성향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런데 그런 성향은

수면 위로 느닷없이 뿅하고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 시대의 보편화된 정신사상과 문화 수준에 의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정신사상과 문화 수준이 진화하면 해석자의 주관도 진화하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오늘날의 정신사상으로는 적군조차 항복하면 학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백여 년 전의 인류는 민간인조차 살육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렇듯 해석자의 주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남녀평등이라는 이념과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은, 당대에서조차 아랍의 분쟁지역과 유럽지역이 다릅니다. 해석자의 주관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며, 그 결과 역사도 달라집니다.

  • (5) 그러므로 역사는 논쟁적이며 항상 자유로운 공론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해석자의 주관에 의해서 역사가 실존하기 때문이며, 다양한 역사를 주고받으면서 더 많은 배움과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더 나은 현재와 더 개선된 미래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독재자와 잠정적인 독재자만이 역사논쟁을 불허할 따름입니다.

  • (6)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 가지 사실, 하나의 관점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와 일본인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가 같지 않습니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 터입니다. 공통점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통점, 즉 인류의 일원이라는 점, 인권에 관한 계몽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관련된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의 스펙트럼과 강도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한국인조차 그/그녀가 지니고 있는 성향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견해가 다릅니다. 이쪽의 위안부 문제와 저쪽의 위안부 문제가 같지 않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갖는 의미 또한 이쪽과 저쪽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너는 이 집단에 속했으니까 배신하지 말고 집단의 공통관념에 따르라’는 명령에 여러분은 행여 포로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2.국가 간 역사문제가 지니는 고유한 문제

국가 간 역사문제는 국민들의 집단 감정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역사문제는 과거에 속하지만 자극된 국민 감정은 현재에 속합니다. 예컨대 한국 인구는 5,022만 명이고, 일본 인구는 1억 2730만 명입니다. 모든 한국인이 과거사에 관심이 있지는 않은 것처럼, 모든 일본인이 역사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립이 격화되면 격화될수록(정치와 언론에 의해 부채질됩니다), 집단감정으로 결속되고 맙니다. 그런 것을 애국심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몰입한 한국사람들은 일본 국민들을 인간이 아닌 사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도 인간이며 감정이 있습니다. 그들도 한국인처럼 똑같이 애국심이 있으며 집단감정을 공유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구는 역사와 정의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를 독점하기 어려운 것처럼 정의도 독점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내가 생가하는 정의가 같지 않은 것처럼, 한국인이 생각하는 정의와 보통의 일본사람들이 느끼는 정의도 같지 않습니다.

더더욱 문제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생각하는 정의가 같을 때입니다. 집단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데마고그와 정치세력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어서,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상대방 국가과 국민들에게 요구하면서 대립과 혐오와 추방을 퍼트립니다. 이것은 위안부 문제와 전혀 관련 없는 현대인에게 악영향을 미칩니다. 즉, 집단감정의 자극은 국가 간 역사문제의 역린과도 같은 것입니다. 증오와 분노라는 집단감정 앞에서 정의는 몹시 연약합니다.

 

3.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한 국가의 한계

  • (1) 사죄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솔직히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사죄가 해결책입니까? 누가 사죄합니까? 직접적인 가해자는 거의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죽은 책임자를 색출하여 부관참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남의 나라입니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 정부는 사멸했습니다. 전후 일본정부가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 그래서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90년 이후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총리가 공식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여러번 사죄를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일본정부의 사죄가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죄가 해결책이었다면 1993년 고노담화를 시작해서 1990년대 무렵에 위안부 문제는 완화되었어야 했을 터입니다.

이번 양국간 협의에서도 현임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죄’에서 ‘진심’으로 쟁점이 바뀌더군요. 국가기관은 사유와 양심의 주체가 아니어서 ‘진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진심’은 사유와 양심의 주체여야 가능하며, 곧 기관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국의 총리나 장관 등의 기관은 공식 발표로만 의미를 갖지 진심은 의미가 없습니다. 진심이 의미를 가질 때에는 기관이 아니라 개인 자격일 때만 그러합니다. 그런데 개인자격이 되는 순간, 사죄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사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 운운은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한편, 일본천황이 무릎 꿇고 사죄를 해야 진심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일본인들을 인간이 아닌 사물로 간주할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 (2) 배상

사죄도 아니라면 배상? 이에 대해서는 ‘법적책임’이라는 골치 아픈 법리문제가 앞에 높여 있습니다. 1965년 한입협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식인은 이 법리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저런 방식으로 풀 수 있다면서 ‘법적책임’을 외면한 일본정부를 비난합니다. 연구, 비판, 비난은 연구자들이나 시민단체의 활동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점입니다.

나는 배상문제만 생기면 마음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1993년 이후로 20년도 더 지난 지금 시점에서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1993년 무렵에 이미 피해자들의 명예는 상당부분 회복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픔을 공유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잔인한 과거의 부당함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위안부의 참혹한 역사가 일본 정부에 의해서 밝혀졌고, 당시 일본 군의 책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일본정부의 공식사과가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명예는 실질적으로 회복되었으나 이론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의 핵심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상이나 아니라 보상 혹은 위로금의 성격과, 일본정부예산이 아니라 일본 국민기금의 형식이 문제가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금전지원의 성격과 형식이 과연 피해자 할머니에게 중요했었는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시민단체에게는 기금의 성격과 형식이 중요했겠으나, 피해자들이 고령이고 형편이 어려운 점을 감안한다면, 대의명분이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한시라도 더 빨리, 그리고 더 큰 금액의 기금이 전달되도록 하고,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도 병행해서 지원하게끔 하는 게 나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시민단체의 지원은 병행이 아니라 경쟁을 택했습니다. 일본국민기금을 수령한 위안부 피해자에게는 한국에서 마련한 지원금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나는 배상문제를 법적책임이라는 법리문제로 보지 않고, 우선 인도적 문제로 여깁니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의 대의명분 관점이 아니라 전적으로 피해자 인도적 관점입니다.

  • (3) 사죄와 배상문제 말고 또 어떤 해결책이 있습니까?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위안부 문제는 여러 모로 지나치게 커졌습니다. 그래서 양국의 정부가 이번 협의를 하게 된 현실적 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국가기관은 해결책으로서 한계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과거의 참혹한 문제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는 개인의 사유와 양심에 의해서 행해집니다. 사유와 양심의 주체는 인간이지 기관이 아닙니다. 따라서 국가기관이 사죄를 하고 화해를 선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큰 부작용을 가져옵니다. 이는 제작년에 블로그에서 <제국의위안부 서평 5>에 썼던 내용입니다. 일부는 제가 예견했던 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첫째, 정치체제의 고유한 문제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입니다. 민주주의 통치 방식에서는 여러 정치세력이 존재합니다. 진보가 있고 보수가 있으며, 우익이 있고 좌익이 있습니다. 민족주의자, 종교주의자, 무정부주의자도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자가 선거에 의해 집권한 다음에 과거사를 해결하겠다고 공표하더라도, 그 반대 세력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 다음에 그 공표를 사실상 무효화하는 경우, 현재문제도 아닌 과거문제로 격렬한 대립이 발생하고, 적대감과 증오심이 확산될 염려가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한 사죄와 화해는 공론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는 한 언제나 부작용이 따릅니다. 특히 국가와 국가 사이의 역사 문제가 놓여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비난 혹은 전쟁 외에는 국가 간 역사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습니다. 국가에 의존할수록 평화는 연약해집니다.

둘째, 가장 큰 부작용은 이런 것입니다. 국가의 반성이 개인의 반성을 가로막거나 은폐한다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과거사에 대해 여러 차례 사죄를 했습니다. 개인은 역사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았는데 국가가 이미 반성했으므로 굳이 개인이 반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국가의 반성이 마치 개인의 반성과 서로 같아지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오히려 국가의 반성을 모욕적이라고 선동하며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면서 적대감을 불어넣는 국수주의자들을 자라나게 하는 토양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4. 국가는 최종심급이 될 수 없다

다시 이번 양국 간 협의에서의 일본측 표명사항 세 번째 단락을 살펴봅니다.

  • 일본 정부는 이상을 표명함과 함께, 이상 말씀드린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

 

이 단락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는 한국측 표명사항에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양국 관료들의 본심이었으며, 이 문장을 집어넣기 위해서 협의했는지도 모릅니다. 공론없이 국가기관이 최종심급을 나섬으로써 결국 극심한 감정대립만이 양산되고 말았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관해서, 그리고 역사문제에 관한 한, 나는 국가간 해결이 최종심급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심급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개인의 마음 속에서 이뤄집니다. 다만, 정부가 나서서 뭔가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국가라는 권위와 책임으로 말미암아 집단적 증오심을 완화하는 방향을 잡을 수는 있을 터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으로는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것이 올바르고, 그런 표현이 없어도, 그동안 민간단체에 담론을 빼앗긴채 부작위하던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만으로도, 위안부 문제의 대강이 해결될 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표명사항에 대해서 관료들은, 워딩이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에, 판단을 미래로 유보한 의미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리라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워딩을 발명하느라 관료사마님 수고하셨습니다(-.-). 어차피 ‘된 것’이 아니라 ‘될 것’이면 굳이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요?

어쨌든 최종심급을 선언한 이 합의를, 그래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일본정부의 공식 표명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측 표명사항에서 저의 견해를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한국측 표명사항에서 동일한 표현이 반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표현을 두고 <진심운운>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국가기관에게 중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라 공표입니다. 국가기관의 관료에게 진심이 공표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것은 그/그녀는 개인자격일 때입니다.

 

(이제 한국측 표명사항에 대한 견해를 밝힐 작정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모든 부분에서 논쟁적입니다.  공론은 아니고 그저 감정의 선동과 대중적 표출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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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소수견해 2

일본정부의 표명사항 첫 번째 단락에 대해서는 <소수견해 1>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래의 견해는 두 번째 단락에 대한 저의 견해입니다. 그냥 단지 두 번째 단락에 대한 저의 입장으로 이해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번 정부간합의에 대한 총평은 제일 마지막에 하렵니다. 두 번째 문장은 이러합니다. 밑줄은 제가 쳤습니다.

 

2.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 왔으며,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 이번에 일본 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전 위안부 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한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전(全) 위안부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거출하여 한일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전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시행하기로 한다.

2.日本政府は,これまでも本問題に真摯に取り組んできたところ,その経験に立って,今般,日本政府の予算により,全ての元慰安婦の方々の心の傷を癒やす措置を講じる。具体的には,韓国政府が,元慰安婦の方々の支援を目的とした財団を設立し,これに日本政府の予算で資金を一括で拠出し,日韓両政府が協力し,全ての元慰安婦の方々の名誉と尊厳の回復,心の傷の癒やしのための事業を行うこととする。

이 두 번째 단락은 어렵지 않은 양보를 함으로써 한국정부를 문제해결의 공식 책임주체로 끌어들인 일본 외교의 성과입니다. 그리고 실무 담당자들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핵심 어구는 세 가지입니다.

  • <경험>,
  • <한국정부가>,
  • <일본 정부 예산으로>

우선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나름 해결하기 위한 사업을 공식적으로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1995~2007)이 그것입니다. 일본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재단법인을 만들고, 그 재단법인을 통해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 사업을 ‘의욕적으로’ 진행한 적이 있지요. 그런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업을 진행했음에도 위안부 문제는 더 첨예하게 되었으면 되었지 전혀 완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사이에서도 그 보상금을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분란도 있었습니다. 시민단체는 주도적으로 그 보상금 수령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배상이 아니라 보상이며, 일본 정부가 국가예산을 직접 사용한 게 아니라 모금 형식을 빌렸기 때문에 결국은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게다가 일본 총무성의 관리를 받는 재단법인이어서 애당초 한국 정부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실효성이 크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본 표명사항 두 번째에서 단락에서 말하는 ‘경험’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경험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정부는 어떤 경험을 지니고 있는 자문해 볼 만합니다. 어떻습니까? 한국정부는 해방 70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서 어떤 국가적 사업을 했을까요? 사실 위안부 문제 자체의 공론화조차 일본쪽에서 시작되었고, 이 문제의 개인배상에 관련해서는 1965년 당시 한국정부가 주도한 한일 협정의 거대한 벽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가 가장 커다란 장애였다고 평가한다고 해서 그 평가가 그릇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요컨대 한국정부는 그 동안 방해자이거나 방관자였던 셈입니다.

한국정부가 직접 나서서 무엇인가를 국가적 사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공부가 되겠습니다). 정부는 한결같이 ‘행위하지 않음’으로 일관했던 것 같습니다. 매우 무책임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피해자 국민들의 아픔과 명예가 있고, 둘째 양국의 국민감정을 악화시키는 중대 외교 사안이었음에도, 셋째 시민단체가 이 문제를 장악하고 담론을 주도하도록 방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정부가 외면하는 사이에 시민단체는 위안부 문제의 담론을 주도했습니다. 다만, 그 담론은 매우 격정적이며 감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과 진의가 어찌되었든, 위안부 문제는 고도의 이성적인 차원으로 다뤄지기보다는 심오하게 감정적인 차원으로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고노담화가 있었던 1993년에서 2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문제는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합의문에서, 종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 첫째 일본 정부가 모금이라는 기이한 형식을 택하기보다는, 그 동안의 비판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예산’을 사용하기로 했다는 변화입니다. 일본정부의 개선된 입장을 보여줍니다.
  • 둘째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개입과 책임을 도출했다는 점입니다. 재단법인 설립을 한국정부가 해야하기 때문에 근거법률이 생길 터입니다. 일본정부와의 외교적 협의와 무관하게 한국정부가 진작 나섰어야 했는데 때늦은 감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셋째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정부의 이름으로,  ‘사업을’ 협력한다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됨으로써, 대화, 논의, 활동에 공식적인 창구가 열렸습니다. 한국정부의 책임이 강화되었으므로 매우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 넷째, 일본정부가 짊어져야 할 짐이 실질적으로 낮아졌습니다. 일본정부의 예산을 사용한다는 양보를 함으로써,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한국정부도 개입시켰기 때문입니다. 한국정부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얻을 것이 없다해도, 해야만 할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정부가 직접 나섰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시민단체 주도의 위안부 문제 운동은 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NGO는 비교적 낮은 책임의식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NGO 자체가 법률 규범에 의해 규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강한 목적의식을 지닙니다. 책임의식과 목적의식의 밸런스는 매우 중요함에도, 현장에서의 문화와 관성과 저마다의 인생을 종합해서 고려하면 밸런스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NGO가 이데올로기 기구로서 권력화되면 상당히 골치 아픕니다. 책임의식이 낮은 반면 장악한 담론은 내놓고 싶지 않는 관성이 생기며, 그런 관성으로 말미암아  더 선명한 목적의식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한일문제는 담론을 장악하기 몹시 쉽습니다. 집단감정을 선동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해결은 멀어짐과 동시에 권력이 생깁니다. 대개 권력은 대적하고 대결함으로써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함부로 도전한다면 그 집단감정을 이용해서 낙인을 찍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래서 NGO 출신이 국회의원이 된다거나 정부여야를 막론하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이 십 년, 이십 년 지속되다 보면 그들의 주장이 진리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무튼 이번 합의문에 따라 한국정부가 근거법률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나는 원합니다. 급진적인 민간단체와 일본정부 사이에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거나 진척될 수 없습니다.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정부가 개입해야지요. 이번 합의문처럼 대화와 논의와 활동의 주체가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의 관계라면 달라집니다.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할 때, 나는 합의문의 일본입장 두 번째 단락을 충분히 이해하며 지지합니다. 단순히 <두 번째 단락>만을 놓고 본다면 상당히 역사적이며 긍정적입니다. 일본 측 표명사항 3 가지 중, 두 가지는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이 두 가지 표명사항에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 가장 어려운 세번째 단락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해결’ 부분입니다. 아마도 지식인들이 열폭하는 상당한 이유는 이 표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내년에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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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한 소수견해 1

앞으로 대략 4-5회에 걸쳐 저의 입장을 정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에 관해서 <긍정적인 태도>이며 지지합니다. 물론 이런 견해는 한국에서는 매우 소수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적 및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세 번째 글에서 다룰 작정입니다. 사실 역사문제의 해석에 관해서는 국가가 최종심급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혹은 의미론적으로 보자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저 표현이 갖는 맥락과 함의를 나중에 따져보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글이며, 역사문제를 바라보는 저의 기본 스탠스와 일본측 표명사항 첫번째 단락만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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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들어가며

한국 인구는 5,022만 명입니다. 일본 인구는 1억 2730만 명이고요. 2013년 기준 통계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역사 문제이기도 하며 외교 문제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이 문제를 쉽게 말하기 어려운 까닭은 1965년 한일협정과 시민단체의 비타협적인 담론장악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양국 국민들이 이 사안에 대해서 이런저런 감정이나 의견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이 문제의 종국적인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고 한일 양국의 국가간 협상을 평가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어쩌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따금 구체적인 문제를 따지기 전에 모든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성급히 판단하고 반응하는 것을 일단 유보한 다음에, 추상에서 시작해서 사안으로 구체화하면서 찬찬히 논리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길게 말하면 인내심을 잃어버릴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짧게 추상화하겠습니다.

2.인간에 대한 짧은 메모

사람은 누구나 감정이 있습니다. 또 이성도 있습니다. 대개 감정과 이성이 섞입니다. 감정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면서 사람의 정신을 장악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으니 그것은 환상(비전)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힘은 종교적으로는 영적인 속성이며, 사회적으로는 이데올로기 개념과 유사한 특성을 지닙니다. 어쨌든 감정, 이성, 환상이 복잡하게 혼합되면서 사람마다 정체성이 생깁니다. 그리고 저마다 세상을 향해 다양하게 반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생깁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는 까닭에 개인 간의 차이는 교환됩니다. 차이의 교환은 증오와 전쟁, 사랑과 우정, 대화와 공존, 이렇게 세 가지 형태를 갖습니다. 이런 교환 형태에 감정과 이성과 환상이 어떻게든 작용합니다. 환상이라는 속성까지 이야기하면 복잡하다고 여길 수 있어서 빼겠습니다. 즉 감정과 이성만을 다뤄보겠습니다. 다만 감정에는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힘이 붙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증폭된다는 점만을 말해 둡니다.

감정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가능한지 이해하고 추론하는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성향과 정념을 강화하는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성은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향과 정념을 억누르면서 올바른 평가와 방향을 추론합니다. 어떤 문제를 감정적으로 다루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역사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은 성장하면서 “합+감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합+이성”을 배웁니다. 여기에서 흔한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이성을 감정이 배제된 무감정의 본성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이 감정과 환상을 통제하면서 더 나은 길을 제시하는 까닭은, 일체의 감정과 일체의 비전을 배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감정과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성의 이름으로’ 더 나쁜 감정과 사악한 비전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두고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즉 비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경험과 교육에 의해서 성숙한 이성은 상대방의 감정과 비전까지 고려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세 가지 형태로 교환된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증오와 전쟁, 사랑과 우정, 그리고 대화와 공존입니다. 사람 사이에 적의를 띤 감정이 교환되면 그 교환형태는 <증오와 전쟁>이 됩니다. 반면 긍정적인 감정이 교환되면 <사랑과 우정>을 만듭니다. 이성이 사회적으로 교환되면 <대화와 공존>을 낳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리고 진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이성을 이용해야 합니다. 감정을 사용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감정으로는 서로 싸워서 끝장을 보자고 보채는 것 외에는 도무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문제해결의 의지는 이성적인 것이지 감정적인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는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아니면 감정적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이것은 아주 명쾌한 이야기임에도 한국사회 지식인들이 가장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생각의 기준에서 가급적 감정을 배제하겠습니다. 이성을 중시하겠습니다. 이성에는 항상 더 나은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조용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대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과 이성이 만약 충돌한다면 이성의 양보를 요구하기보다는 감정의 양보를 정중히 요구하겠습니다. 감정으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역사문제에 접근한다면 이쪽 집단감정과 저쪽 집단감정을 만날 뿐입니다. 그것은 해결 의지가 없는 대결감정입니다.

 

3.합의문의 일본 입장 첫 번째 단락에 대해서:

이번 양국 외교장관 합의문은 양국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의 발표형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각각 일본 입장 3개 단락, 한국 입장 3개 단락의 <표명사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일본 입장 첫 단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어 표현은 한국 외교부 웹사이트에서, 일본어 표현은 일본 외무성 웹사이트에서 인용합니다.

 

1.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이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아베 내각 총리 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1.慰安婦問題は,当時の軍の関与の下に,多数の女性の名誉と尊厳を深く傷つけた問題であり,かかる観点から,日本政府は責任を痛感している。安倍内閣総理大臣は,日本国の内閣総理大臣として改めて,慰安婦として数多の苦痛を経験され,心身にわたり癒しがたい傷を負われた全ての方々に対し,心からおわびと反省の気持ちを表明する。

 

이 단락은 기본적으로 1993년 고노담화를 계승한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에와 존엄의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는 부분,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는 부분은 고노담화와 워딩이 같습니다. 즉, 이 첫 번째 단락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인 고노담화를 다시 확인하는 수준입니다. 일본은 당최 사과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더러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파란색 부분은 매우 중요 표현으로 보입니다. 총리를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즉 <아베 내각 총리 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라는 표현입니다. 그냥 <아베 내각 총리 대신은>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추가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는 총리라는 정부 수반으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총리 개인의 자격으로 사과하는 것 아니냐는 꼬투리잡기를 예방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과거 일본 총리들이 기금 관련해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총리자격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쓴 편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라는 표현은 그런 주장을 예방하기 위한 표명조치입니다.

한편, 양심의 주체는 기관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에서, 고노담화는 사죄와 반성의 주체가 일본정부여서 이치에 맞지 않았다고는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합의문에서는 일본정부의 수반인 ‘일본 총리’가 사과와 반성의 주체로 표기됨으로써 이치에 부합하다고 평가합니다.

빨간색 부분, ‘이러한 관점’과 ‘다시 한 번’은 아마도 일본정부 측에서 중시한 표현이라 봅니다. ‘다시 한 번’이라는 표현은 그 동안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사과해 오지 않았느냐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그렇다 치고, ‘이러한 관점’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가 있었고,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힌 문제라는 관점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일본정부가 ‘군의 강제동원 인정’할 것과 그러므로 ‘법적책임’을 지고 배상할 것을 주장하며 그것의 관철을 요구합니다. 이들에게 화해는 관심 밖이며 완벽한 승리만을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부욕은 감정이지 정의가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주장은 불가능합니다. 소위 ‘국익’과 ‘애국심’이라는 게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본 정부는 전제정치의 군황이 아닙니다. 1억 2730만 명을 대표하는 정부이고 거기의 민주주의와 사법질서가 있어서 함부로 불리한 주장을 하기 어렵습니다. 함부로 불리한 주장을 하면 그곳에서의 비난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외교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일본 정부는 당시 군의 관여를 이미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양국의 합의문에 그 관여는 ‘강제동원’이었소라고 쓸 바보도 없지만, 강제동원이 아니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유치합니다. 이는 ‘책임’과 ‘법적책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삼권분립되어 있으며 법치주의 국가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정부가 함부로 ‘법적책임’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으며 외교행정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맥락으로 표현을 고찰하면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법적책임은 어쨌든 법원에서 다툽니다. 다만, 1965년 한일협정이 있었는데, 그 협정에서 ‘피해자 개인배상 필요 없다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선언한 게 한국정부였으며, 이를 일본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합의문의 일본입장 첫 번째 단락을 충분히 이해하며 내가 이를 지지함에 있어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제 일본 측 표명사항 두 번째 단락을 다음 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에는 굉장히 중요한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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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국가,종교문제에 관해서

무릇 민족, 국가, 종교에 관련한 문제에 관해서는 일관되게 이성적이어야 하며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민족, 국가, 종교에 관련한 문제에 관해서는 쉽게 분노하고 쉽게 적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분노와 적의는 쉽게 선동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금세 집단화됩니다. 집단 감정은 불처럼 번져서 이성을 태워버리며 공격적인 본능을 발굴하며 퍼트립니다. 집단에 불리한 사실관 견해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거되며, 가공된 사실이 진실처럼 여겨지며, 무지와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에도 파고 들어가 적의의 씨앗을 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면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SNS 세계에서는 모두가 선동가가 될 수 있으며 모두가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성적인 자세는 누구에게나 더더욱 다급하게 요청됩니다.

정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도피처는 영(Spirit)으로의 기댐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Soul towards Spirit. 이 세계가 처한 어려움은 이것입니다. 큰불은 물을 끼얹는다고 꺼지지 않습니다. 차분히 기다릴 수밖에 없으며 정서적인 대피가 필요합니다. 불길을 잡기 위해서 맞불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맞불이 우리를 삼킬 터입니다.

이성을 혐오하고 감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고, 선동가들은 이에 편승하여 더욱 집단감정을 조장하며 그들은 언제나 승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관되게 평화에 거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평화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지구 곳곳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는 합니다.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무기들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백 년 전, 천 년 전, 만 년 전과 비교하면 현대 인류가 가장 평화롭습니다. 야만보다는 이성이 앞서 있고, 혐오보다는 공존이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이성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선이 성장한만큼 악도 강해졌습니다. 파괴적인 무력은 잔뜩 웅크리고 기회를 엿봅니다. 이성이 통제력을 잃으면 괴물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질긴 싸움보다는 신속한 화해를 택해야 합니다. 이겨서 적을 모욕주기보다는 도무지 대적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다행히 현대 사회는 민족, 국가, 종교에 관련한 문제로 개인의 인생을 파괴하는 경우는 현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조선 땅에서는 민족, 국가, 종교에 관한 문제로 불처럼 싸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내가 익힌 인류 스승의 지혜요 내가 아는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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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지도자2

(이어서)

4. (지도자의 자격에 관한 과거와 현재) 지도자는 탁월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 현대에 이르러 평등사상이 크게 발전하면서 지도자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을 듯하다. ‘현대의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인류사를 길고 멀게 바라본다면 그렇지는 않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인류 역사 어느 때에서나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었다. 현대와 과거가 다른 점은 출생신분으로 지도자의 자격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의 양지는 그 사람 자체의 능력만으로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반면 누구나 지도자를 욕망함으로써 지도자 후보가 양적으로 팽창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지도자 선별이 어려워졌다는 점이 현대의 그늘이다. 돈과 지위가 있으면 지도자를 의욕한다. 시대의 욕망은 그 시대를 닮는다. 과거 욕망은 봉건적이었고, 그러므로 소수 왕족이나 귀족으로 통제됐다. 오늘날 욕망은 자본적이며 대량생산되었다.

5. (지도자의 자격) 능력이 낮은 사람이 능력 높은 사람들을 지도하기는 어렵다. 일단 대중이 따르지 않는다. 분란을 통제하기 어렵다. 설령 대중이 따르더라도 잘못된 길로 대중을 인도할 염려가 있다. 지도자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대부분의 비극은 보잘것없는 자가 지위를 함부로 탐해서 지도자가 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따를 수 없는 자가 리더가 돼서 따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분란이 발생한다.

그런대 대체 탁월한 능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두 가지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자질과 적극적으로 요구돼서는 안 되는 자질이다. 전자는 책임감이며 후자는 지능이다.

우선,책임감이 낮은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 지도자의 특권은 높은 책임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도자의 재능은 지능이 아니다. 높은 지능을 가진 자는 여러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그 재능에 따라 더 높은 지위를 얻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지능이 지도자의 자격을 증거하지 못한다. 지능은 때때로 극히 위험하다. 지능만 높을 뿐 선악에 민감한 양심이 없다면 그 본성은 쉽게 타락하며 그 결과 대중은 최악의 지도자를 체험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짓밟힌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과 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심을 지도자가 갖춰야 할 기본 재능으로 선별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요소를 갖췄지만 문제를 간파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역시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 대중은 언제든지 착한 바보를 폭로하고 외면한다. 그러므로 문제를 간파하며 대중에게 더 나은 개선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평균이상의 지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지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면 지적인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한다. 학습능력이든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이든 그러하다. 사실 이성은 윤리적이며 동시에 지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선과 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심과 더 나은 개선을 향한 지혜는 리더가 갖춰야 할 탁월한 재능의 동전의 앞뒤면이기는 하지만, 어떤 경험을 가졌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갖는다. 그 색채에 따라 자연스럽게 당파가 만들어진다. 당신 주위의 지도자는 어떠한가?

 

6. (지도자 자격 문제의 한계) 그러나 지도자의 자격은 정확히 측량할 길이 없다. 설령 측량이 가능하다 가정하더라도, 현대 사회는 회사든 단체든 국가든, 스스로 의욕하는 것만으로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타인이 인정함으로써 지도자로 선별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대중의 자격이 지도자의 자격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7. (대중의 자격) 그런데 대중에게는 자격이 필요 없다. 그냥 존재함으로써 자격이 생기는 것이 대중이다. 대중은 개인들의 집합이며, 모든 개인은 공평하게 취급된다. 개인으로서는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자격을 요구받게 되겠지만 대중으로서는 아무런 자격을 요구 받지 않는다. 대중으로서는, 단 하나의 책임 외에는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책된다. 그 책임이란 탈주하는 지도자를 선택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중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과반수의 대중은 자격 없는 자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거부는 생각의 결과이다. 그런데 대중은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대중의 자격에 관한 대부분의 논점은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결국 그 사회의 개인들의 과반수는 지도자의 자격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그런 능력을 갖춘 대중을 ‘시민’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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