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위한몇가지메모

어린이를 위한 몇 가지 메모

우리는 마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마음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며, 안쪽에 있는 마음과 바깥에 있는 마음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의 목소리와 마음의 움직임을 듣고 진단하면서 마음의 질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대를 달리 말하면 심리학의 시대라고도 하고 정신병리학의 시대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를 조사해서 마음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풀어내려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이 때때로 재미있기는 합니다. 일시적으로 도움도 됩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는 효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시대는 일단 올바름의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에 관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 질문은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것이어서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우리는 표류하는 인생을 살고 맙니다. 우리 인류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은 종교에서 찾기도 했고 철학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니 그 말씀을 통해 올바름에 관한 답을 찾자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철학은 어딘가에 적혀 있거나 혹은 전해들은 말씀을 무작정 따르기보다는 무엇이 올바른지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다양한 철학이 있습니다. 종교는 몇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철학은 몇 가지 용어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제부터 어린이를 위해 몇 가지 용어를 풀어서 설명합니다.

인류 역사에는 많은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철학을 위주로 설명합니다. 칸트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칸트 할아버지의 철학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철학 자체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설명하는 단어의 뜻을 잘 기억하고 있으면, 칸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굳이 칸트 할아버지가 아니어도 굳이 칸트철학이 이것이요 저것이요 따지지 않더라도, 무엇보다 어린이 여러분이 똑똑해지고 생각이 쑥쑥 자랄 수 있습니다. 단어 몇 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되는데, 그게 바로 철학의 힘이랍니다. 게다가 착한 어린이가 됩니다. 이런 단어의 뜻을 모르는 어른들도 많습니다.

 

경험

우리 인간이 실제로 해보거나 겪어 보는 것을 뜻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만져보는 것도 경험이며, 공부하는 것도 경험입니다. 책을 읽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TV를 보는 것도, 친구들과 노는 것도,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 알거나 느끼게 된 것도 경험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경험이 0이었습니다. 자라면서 하나씩 하나씩 경험을 쌓습니다. 경험을 많이 하면 지식도 많아지겠죠. 아는 것도 많아집니다. 물론 잘못 아는 것도 생깁니다. 서로 다른 경험을 해놓고서는 누가 맞냐며 티격태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니 경험과 내 경험이 서로 다르니까, 이렇게 다툴 필요는 없어.”

 

순수

아마존 밀림에 사는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과 세상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로 경험이 완전히 다를 수 있어요. 생긴 것도 많이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공통되나요? 그래요. 모두 인간이며, 인류입니다. 이런 공통 부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아마존 경험과 서울 경험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험을 빼야만 우리 인간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됐어요.

첫째, 모든 인간은 공통점이 있다.

둘째, 그런데 그 공통점은 경험이 아니다.

칸트 할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 공통점은 경험이 생기기 전부터 있는 것이니까 경험이 없는 것, 경험이 묻어 있지 않은 것, 그래서 ‘순수’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철학에서 ‘순수’라는 말의 뜻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경험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성

옛날부터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생각하는 힘”에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는 힘이란 무엇일까요? 생각은 이것저것 아주 많지요. 오늘 저녁에 먹고 싶은 것을 떠올려보는 것도 생각이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것도 생각이고,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의 뜻을 이해하는 것도 생각입니다. 생각은 아주 많습니다. 생각 중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것일까?”, “무엇이 착한 것일까?”, “친구와 약속했으니까 지켜야 하지 않을까?”, “친구를 왕따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을까?,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우리나라가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좋은 사회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이 올바른 것이며, 무엇이 착한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생각하는 힘을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생각하는 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힘을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공부 잘하는 힘이 아닙니다. 공부 잘하는 힘은 지능이지요. 지능이 높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그 사람이 뛰어난 인간은 아니랍니다.

 

학문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깊이, 오래 공부해서 잘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잘 만들어진 지식을 학문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학교에서 수학, 영어, 국어, 사회, 과학, 음악, 미술을 배웁니다. 그러면 7개의 학문이 있는 거지요. 방과 후 수업까지 포함하면 더 많습니다. 어른이 되면 학문의 개수는 더더욱 많아집니다. 법을 공부하는 학문은 법학, 경제를 공부하는 학문은 경제학, 의술을 공부하는 학문은 의학, 건축에 대해서 공부하면 건축학. 어쨌든 과목이 아주 많지요. 학문 안에는 수십, 수백 개의 과목이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서 다 잘할 수는 없지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좋아하는 몇몇 개를 골라서 공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술도 무엇인가를 열심히 잘 공부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것도 학문과 같습니다. 옛날에는 지식의 양이 작았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이것저것 다 배우지는 않았어요. 선생님이 없었고 책도 없었고 학교도 없다면 배울 것도 없었겠죠. 남는 게 시간이고, 그래서 맨날 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과관계

그런데 모든 학문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학문의 공통점>, 이게 무엇일까요? 학문은 어떤 “관계”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그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생깁니다. 엄마와 아빠가 있으니까 아이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태양이 떴습니다. 무엇 때문에 태양이 뜨는 것일까요? 53에 어떤 숫자를 더했는데 62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 숫자는 무엇일까요? 아프면 다 이유가 있겠죠. 의사가 그 원인을 알려줍니다. 어떤 어린이는 이번에도 회장선거에 나왔는데 3표밖에 얻지 못하고 떨어졌어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런 식으로 모든 학문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사람들은 짧게 줄여서 말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어린이들도 그렇잖아요? “생일 파니”는 “생파”, “생일선물은 “생선”. 그런 것처럼, 원인의 인, 결과의 과만을 따서, <인과관계>라고 말합니다. 뭐라고요? 그래요, 인과관계입니다. 인과관계를 공부하는 것이 모든 학문의 공통점입니다. 네 글자도 많아요. “생파”나 “생선”처럼 두 글자로 줄일 수 없을까요? 물론, 가능하지요. <인과관계>를 두 글자로 줄이면 <원리>입니다. 8글자로 늘이면요?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철학

철학은 학문의 공통점 중에서 가장 공통된 인과관계를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와이 시리즈 알지요? 재밌지요? 그게 7천만 권이나 팔렸답니다. 0이 일곱 개나 필요한 크기의 숫자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와이?>, <언제나 왜?>라고 물어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원인을, 원인 중의 원인을 궁금해하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 왔을까?”,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그런 행동이 나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모든 아이들이 곱셈과 나눗셈을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 “어째서 선생님들은 이런저런 규칙을 만드는 것일까?”,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사랑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는 어째서 다를까?” 이렇게 물음표를 던지면서 갸우뚱하면서 생각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입니다. 그런데 철학을 왜 공부할까요? 밥을 많이 먹으면 무거운 것을 드는 힘이 세지고, 철학을 공부하면 생각하는 힘이 세집니다. 영어를 잘한다고 착하지는 않지만, 철학을 잘하면 착해집니다.

 

자연

이거 정말 어려운 단어랍니다. “자연”의 뜻을 잘 이해하면 어른보다 뛰어난 어린이가 됩니다. 아빠보다 똑똑한 소녀가 됩니다. 자연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은 자연일까요? 자연이 아닐까요? 자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정답이고,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도 정답이랍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힘이 있고, 모든 사람은 “내 마음대로” 뭔가를 판단하고 긍정하고 거절하고 또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답니다. 그런 힘을 “의지”라고 해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할 때의 마음, 그게 “의지”예요. 그런 의지가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점에서는 자연이 아닙니다. 그때의 인간을 “자유”라고 부른답니다. 자유가 있다면 자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미 정해진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인간은 자연입니다. 우리 몸은 자연입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습니다. 이것은 자연입니다. 물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 가야 합니다. 그것도 자연입니다. 의지로 생겨서나 오늘이건 내일이건 자유롭게 내 의지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한 것은 모두 자연입니다. 그러니까 산, 강, 바다, 하늘, 별, 달, 우주, 집, 학교, 세상의 모든 물건은 자연입니다. 그렇다면 퀴즈, <학교 공부>는 무엇인가요? 그래요. 자연입니다. 우리 어린이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당연히, 학교에 가야 합니다. 또 퀴즈. 왼손의 반대편 손은 무엇인가요? 맞았어요. 오른 손입니다. 그러면 그런 의미로 자연의 반대말은 무엇인가요? 인간? 땡! 틀렸습니다. <자유>입니다.

 

초자연

자연은 보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있거나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연을 알아요. 자연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누구든지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뭔가 굉장한 믿음이랄까 아니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무엇이 있어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면, <초자연>이라고 해요. 아주 어려운 말로는 “형이상학”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냥 <초자연>이라고 불러봐요. 경험과는 무관한 세계, 경험이 없는 순수한 세계, 없을 것 같지만 또 있는(있는 것 같은) 세계를 초자연이라고 말해요. 예를 들어, 꽃을 꺾으면 그 꽃은 죽어요. 이것은 자연입니다. 꽃을 꺾으면 그 꽃이 아프다고 해요. 이것은 초자연이에요. 꽃의 아픔을 우리는 경험할 수 없지만 그 아픔을 어쩐지 느낄 수 있지요. 하느님도 부처님도 우리는 볼 수 없어요. 하느님도 부처님도 자연은 아니랍니다. 그러나 초자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또 그럴 것 같지요. 자연과 초자연은 이렇듯 함께 있습니다. 자연은 경험을 통해서 나타나며, 초자연은 경험하지 않고도 느껴집니다. 자연을 모르면 바보라고 놀림 받을 수도 있어요. 초자연을 모르면 바보는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가 없답니다.

 

도덕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합니다. 착함을 전제로 합니다. “나쁜 사람이 되는 규칙”, “엄마를 괴롭히기 위한 열 가지 규칙”, “친구를 왕따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규칙” 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만약 있다면 없애야 하고요. 그런데 규칙은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따집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요. 마음은 도덕과 관련이 없습니다. 나쁜 마음을 품고 있든, 착한 마음을 생각하고 있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규칙을 지킨 것도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도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행동과 무관하게 마음을 따지는 것은 종교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도덕은 누군가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이 좋은 규칙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따져서,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도덕은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철학

도덕이란 대체 무엇인지, 어떤 규칙이 참다운 도덕규칙인지, 무엇이 착한 것인지를 깊이, 오래, 열심히 생각하는 철학입니다.

 

아프리오리

아까 <순수>라는 의미를 배웠지요? 아프리오리는 <순수한 상태>를 뜻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험으로부터 순수한 상태”이며, 모든 사람의 경험이 이러쿵저러쿵 모두 달라도, 이 사람이게나 저 사람에게나 똑같다면 그것은 경험보다 앞선 무엇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을 아프리오리라고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니다.

*

**

***

Advertisements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서점에는 글쓰기에 관한 수십 권의 책이 있습니다. 굳이 서점에 가지 않아도 괜찮지요. 인터넷 검색을 하면 글쓰기 비법에 관해서 금세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글쓰기 선생들이 알려주는 비법을 읽고 또 읽어도 좀처럼 글쓰기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저 몇 가지 팁을 얻는 정도일 뿐이죠. 게다가 그런 팁조차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맙니다. 마치 인터넷 검색으로 ‘돈 버는 방법’을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그 정보가 잘 기억나지도 않고, 자기에 맞지도 않지요. 남의 경험이 자기 것으로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보가 다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리사 업무도 매일같이 글을 쓰는 일입니다. 생각하고 글을 쓰지요. 다만 매우 실용적인 글쓰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글을 씁니다. 어쩌면 우리 같은 사람이 말하는 글쓰기 방법이 더 유용할지도 모릅니다. 작가 정신을 뒷받침하는 격조 높은 수준의 글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수준으로 실용적인 글쓰기에 대해서 조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실용적인 수준에서 글쓰기를 고민하지, 작가의 숙련을 생각하며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부터 하는 조언은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는 몇 가지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우선, 어떤 글쓰기냐에 따라 글을 잘 쓸 수 있는 방법이 다릅니다. 글쓰기에는 한 가지 색채와 형태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글을 쓸 때에는 상황과 처지와 목적이 다 다릅니다. 그것을 감안하면서 글쓰기를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를 안내하는 책이야 많기는 많습니다만, 굳이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돌베개, 2007)를 조심스럽게 권합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고 예시하면서 다양한 글쓰기 방법이 실려 있는데, 자못 시원한 시야를 줍니다.

당대의 문인이나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 조언은 대개 소용이 없지요. 너무 수준이 높거나 지나치게 엄격합니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관심사가 비좁기도 합니다. 글쓰기 공포가 있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금지 규정을 말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더군요. 글쓰기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지 말라는 둥, 문법을 중시하라는 둥, 혹은 띄어쓰기와 철자 이야기를 강조하곤 하지만, 그런 규정을 다 지킨다고 글쓰기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참고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구체적이며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좇을 필요는 없습니다.

글쓰기 공포와 글쓰기 재미 사이에 문턱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 문턱 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턱을 넘을 때가 옵니다. 바로 그 순간 에 이르면 작가들이 말하는 수준에 자연스럽게 근접하고, 한편으로는 자기 스타일이 생기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구체적인 조언도 잘 들리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 문턱을 넘지 못해서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문인과 작가의 유별난 재능을 함부로 좇니는 마십시오.

문학하는 사람들은 글쓰기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들은 탁월한 만큼, 철자, 띄어쓰기, 문법, 단문과 장문의 조화, 접속사의 생략, 언어의 조탁과 비유의 취급에 대해서 모두 신경을 써야겠죠. 작가처럼 탁월하게 글을 쓰고 싶다면 어쨌든 조목조목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글쓰기도 기술이고, 장인이라면 기술에 통달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이 작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철자와 띄어쓰기? 틀릴 수도 있죠. 문법? 그건 난해한 거예요. 접속사? 필요하다면 많이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매력적인 문장 사용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작가들이 조언하는 수많은 글쓰기 규칙은 자기들 세상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하다면, 글을 쓰다가 ‘저절로’ 알게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좋은 글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글에 리듬이 들어가면 읽는 재미가 생깁니다. 독자가 그런 재미를 느끼면 당연히 좋은 글입니다. 그러면 질문이 이제 바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글에 리듬을 넣을 수 있을까요? ‘글’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인간의 언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말과 글입니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말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면 십중팔구 글에 리듬이 생깁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지요. 글을 쓰면서 그 글을 ‘머릿속에서 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장이 달라집니다. 본디 인간의 원시 언어는 문어가 아니라 구어입니다. 문자는 나중에 발명됐습니다. 언어의 원형은 문어가 아니라 구어라는 점에서, 글쓰기를 문어가 아닌 구어에 더 가깝게 훈련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거나 찾을 수 있습니다. 필경 그것은 ‘리듬’일 것입니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말로 지식을 전했습니다. 공자와 노자의 말씀을 오랫동안 구전으로 암송해서 나중에 글로 옮긴 것이 논어이며 도덕경이라 합니다. 석가모니도 예수도 직접 글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말’로 가르치고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제법 세월이 흘러 그 ‘말’이 ‘글’이 돼서 경전으로 편찬된 것입니다. 그 세월 동안에는 말로 전승되었겠지요.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말이 잘 전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했겠습니까? 바로 ‘리듬’입니다. 이 ‘리듬’이 구전의 핵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말이 노래와 비슷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언어의 원형에 맞게 ‘글’을 ‘말’에 가깝게 쓰면 글쓰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대화체로 쓰라는 말은 아닙니다. 글에 ‘리듬’을 부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머릿속으로 말하면서 글을 쓰면 자연스럽게 리듬이 붙게 됩니다.

문장이 너무 길거나 복잡하면 리듬이 죽어버립니다. 머릿속으로 말하면서 글을 쓰다 보면 그런 문장을 대부분 잡아낼 수 있습니다. 글에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말에 가까운 글을 쓰는 것, 그것이 실용적인 글쓰기에서는 참 유용한 해결책입니다. 말에 가까운 글이 제공하는 장점들은 이렇습니다.

말은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반면 글은 상대방보다는 문장을 더 배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서 상대방을 잘 배려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에 가까운 표현을 찾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실용적인 글쓰기에 관한 것이므로, 어떤 연구원이 자신이연구하고 있는 기술에 대한 글을 적는다고 생각해 보지요. 논문일 수도 있고 특허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회사 안팎에서 사용하는 여러 제안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기술을 글로 잘 표현하는 일은 쉽습니까? 아니면 어렵습니까? 대부분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게다가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대개 이공계 출신인데, 이 사람들은 글쓰기 재능의 부족을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말로 설명하면 용케도 해냅니다. 말을 할 때에는 상대방을 곧잘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용어가 달라집니다. 상대방이 전문용어를 모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수준에 맞게 표현을 조절하면서 가급적 조리 있게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글이 말을 닮으면 리듬이 생기며, 독자를 조금 더 배려하게 돼서 읽히기 좋은 문장이 됩니다.

리듬이 있으면 글이 삽니다. 하지만 리듬만으로 부족할 때가 많지요. 당신이 글을 쓸 때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설명하거나 무언가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이따금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표현하면서 공감을 얻고자 할 때도 있겠죠. 어떤 경우이건, 글을 쓰는 목적과 관련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인 것입니다.

독자들은 으레 기억력이 좋지 않습니다. 당신이 방금 ‘분명히’ 이야기한 것조차 독자들은 귀신같이 까먹습니다. 당신의 언어는 금세 휘발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열심히 글을 썼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불충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단어와 문장에 밑줄을 치면서 읽는 게 아니까요. 태반이 대충 읽거나 자기가 읽고 싶은 부분만 읽거나 그냥 무심코 읽습니다. 독자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으로 충만하답니다. 글쓴이의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 딴 생각에 빠져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타인의 기억력에는 방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그런 습관을 인정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요. 그런 다음에 대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 대책은 무엇일까요?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도 뒤에서 다시 요약해주세요. 글이 길어진다 싶으면 중간중간 정리해주고 다시 반복해 줍니다. 오해할 만한 표현이나 내용이 있다면, 그게 설령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어도 친절하게 오해를 예방해 줘야 합니다. 물론 똑같이 반복해서 표현하면 재미가 없고 수준 낮은 글처럼 비쳐집니다. 그러므로 반복은 하되 조금씩 표현을 바꿔주세요. 반복과 대조의 원리 같은 것입니다. 모짜르트나 베토벤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도 노래를 작곡할 때 반복과 대조를 사용한답니다. 반복도 사실 언어의 리듬입니다.

다음으로 독자들은 대체로 이해력이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은 높은 수준으로 표현을 연산하면서 글의 의미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냥 쓰윽 지나가면서 말을 듣고 글을 읽습니다. 순간적으로 이해하며, 또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순간적인 대화만으로도 의사소통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며 지식도 잘 전달됩니다. 그 까닭은 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는 인과관계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잘 맞고,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잘 어울린다면, 선후관계가 잘 정리되어 있다면, 어떤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과 이유가 잘 설명된다면, 또 글에 담은 메시지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예상할 수 있다면, 상대방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 체계는 논리에 잘 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과관계가 없고 무엇이든 뒤죽박죽인 문장에 대해서는 잘 납득하지 못합니다.

솜씨 좋은 작가는 접속사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문장을 잘 꿸 줄 알고 그래서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을 의미만으로 연결할 수 있는 재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작가가 아니니까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접속사를 가급적 많이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또한, 더구나, 게다가, 그러므로, 그래서, 그런 까닭에, 그러니까, 따라서, 그러나, 하지만, 그렇지만, 한편, 그런데 등}라는 접속어 집합에서 적당한 낱말을 찾아 앞뒤 문장을 이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알맞은 접속어는 글의 논리를 키워줍니다. 논리가 또 리듬이기도 합니다.

우리 말에는 주어가 필요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영어와의 큰 차이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인과관계는 대체로 주어를 필요로 합니다. 주어 없는 인과관계는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공통된 화제나 무엇에 대한 설명을 하는 글을 당신이 쓴다면, 주어를 명확히 해줘야 할 때가 있을 겝니다. 작가들은 순우리말의 문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가세계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실용적인 글쓰기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영어처럼 그냥 과감하게 사물주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도 좋고, 수동태로 인과관계를 표현해도 괜찮습니다. 특히 기술을 설명할 때에는 그러합니다.

전문가들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글을 많이 써야 한다거나 혹은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요리를 잘하려면 요리를 많이 해야 하고 훌륭한 요리를 많이 체험해 봐야 합니다. 축구를 잘하려면 공을 많이 차고 훌륭한 선수들의 축구를 많이 봐야죠. 공부를 잘하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모두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글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글을 쓸 게 있어야 글을 쓰겠죠? 글은 생각을 적는 작업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글 쓸 거리’가 생깁니다.

상대방이 당신에게, 너무도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심지어 근엄하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겉으로는 들은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딴청 부리게 됩니다. 얕잡아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말을 닮은 글쓰기로도, 반복과 인과관계만으로도 글을 제법 잘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은 잘 썼는데 끌리지 않는 경우도 많지요? 그래서 글에 독창적인 생각이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담겨 있어야 훌륭한 글입니다.

어떻게 독창성을 키울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하룻밤이 지납니다. 독창적인 사람의 글을 읽어도 좋고, 인류 천재들의 지혜를 읽는 것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 보는 것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는 독서는 점점 낯선 문화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서가 당신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

**

***

 

디자인극장

<디자인에 관련되는 권리>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모색될 필요가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포괄적이고 거기에는 다종다양한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디자인보호법> 혹은 <저작권법>이 보호하는 권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두 법률의 보호망은 생각보다 작답니다. 법률이라는 것은 결과만을 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디자인의 결과물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적인 태도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요. 그렇지만 디자인이라는 창작물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여러 사람이 개입합니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처지와 활동이 있고 그것에 따라 디자이너의 권리가 여러 모습을 바꾸며 달라집니다. 이런 특성을 효과적으로 조금 더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디자인극장>이라는 이름의 다소 낯선 방식을 택했습니다.

 

막이 오르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등장한다. 디자이너 성춘향이 이 극장의 주인공이다.

이름 배역
정우성 소비자
홍길동 판매업자
임꺽정 제조업자
성춘향 디자이너
장길산 디자이너
황진이 일레스트레이터

 

제1막 제1장

소유권

모든 경제활동의 기본 권리는 소유권이다. 소비자 <정우성>은 시장에서 스마트폰을 하나 구입했다. 스마트폰은 정우성의 물건이며, 정우성이 스마트폰의 소유자이다. 정우성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의 스마트폰을 함부로 만지거나 슬쩍 훔쳐갈 수 없다. 남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일종의 사건을 구성한다. 절도 현장이라면 정우성은 힘을 써서 자기구제를 할 수 있다. 사건 발생 후라면 정우성은 증거를 내세우면서 국가의 구제를 요청할 수 있다. 이처럼 소유권은 완전한 것이며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소유권자는 타인의 불법부당한 간섭과 침해를 온전히 배제할 수 있다. 이런 완전성과 배타성은 소유의 대상이 물건이기 때문이며, 또한 정우성이 소유물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스마트폰을 시장에서 정당하게 구매했다는 사실이 진실인 한, 누구도 그 스마트폰에 대한 정우성의 소유권을 제한할 수 없다. 이러한 소유권의 성격에 대해서 디자인 극장의 관객들 모두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은 이렇게 쉽다. 하지만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쉬운 게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는 제품이 눈에 보이는 물건이며, 물건에 관한 소유권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권리는 물건에 관한 소유권이 아니다. 디자이너 <성춘향>과 <장길산>은 때때로 ‘지적소유권’을 가질 뿐이며, 때때로 인정되는 그런 ‘지적소유권’을 바탕으로 디자이너가 독점권을 주장하곤 한다. “내가 ‘이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 ‘지적소유권’은 스마트폰을 소유한 정우성처럼 어떤 물건을 손에 꼭 쥐고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지배하는 권리가 아니다. 물건에 관한 권리와 달리, 디자인에 관한 권리는 타인의 사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타인의 디자인 사용이 발생한 다음에 그런 사용행위에 대해 국가의 도움을 받아 법적인 응징할 수 있다는 의미의 불완전한 소유권이다. 물론 그런 권리가 디자이너에게 있다면 말이다.

 

제1막 제2장

디자인 외주와 권리의 향방

디자이너 <성춘향>은 별도의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제조사 <임꺽정>은 디자인 X에 대해 성춘향에게 외주의뢰를 했다. 이때 소유권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몇몇 ‘이론적인’ 전문가는 성급히 디자인 X의 창작자가 성춘향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디자이너의 권리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세상은 그렇게 나이브하지 않고 현장은 이론적이지 않다. 이런 관계의 핵심은 임꺽정이 성춘향에게 디자인을 발주했다는 사실이다. 임꺽정은 성춘향에게 대금을 지불한다. 성춘향은 그 대가로 디자인 X를 임꺽정에게 제공한다. 쌍방 간의 이런 의무를 우리는 계약이라고 부른다. 당사자에게 계약은 법률이다. 계약과 법률의 규정이 충돌할 때, 그 계약이 지독하게 비합리적이지 않는 한, 계약이 법률에 앞선다. 성춘향이 임꺽정을 위해 디자인 X를 완성해서 그 디자인이 적용된 어떤 물건을 임꺽정에게 넘긴다면 그 물건의 소유권은 자연스럽게 임꺽정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물건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그 디자인에 대한 권리라면 어떻게 될까? 특허, 디자인권, 저작권 등의 권리 귀속 문제가 생긴다. 성춘향과 임꺽정이 작성한 계약에 의해 권리의 향방이 정해진다.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계약서에 디자인X의 지적소유권이 <임꺽정>에게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 경우. 당연히 임꺽정이 그 권리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계약한다. 디자인등록이나 특허출원도 임꺽정이 한다. 성춘향이 몰래 하면 반칙이다. 또한 그 디자인 X가 유명해졌을 때 얻어지는 모든 법적 이익을 임꺽정이 갖는다. 디자인 X가 저작권을 동반한다면 그 저작권도 임꺽정에게 양도된다.  <성춘향>은 대신 돈을 받는다.

계약서에 디자인X의 지적소유권이 <성춘향>에게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 경우. 당연히 성춘향이 그 권리를 갖고 임꺽정은 사용권을 갖는다. 현실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예컨대 디자이너 성춘향이 매우 유명하거나 유능하여 우월한 지위를 갖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임꺽정의 발주에 의해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디자인 X가 완성되어 있는 경우, 혹은 디자인 X가 제품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가치가 있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어쨌든 예외적인 케이스.

계약서에 디자인X에 대한 지적소유권 귀속 문제가 규정되어 있지 않는 경우. 특별한 상황이 아닌한, 디자인 X에 대한 소유권은 임꺽정이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이견 있음). 지적소유권의 귀속에 관해서 당사자가 명시적으로 합의하지 않았더라도, 외주 발주와 납품이라는 관계에서는, 디자이너 성춘향이 디자인X의 소유권을 임꺽정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시장의 원리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제조사 임꺽정은 디자이너 성춘향의 고객이자 소비자이다. 성춘향은 임꺽정에게 ‘디자인’이라는 자신의 상품을 판 것이다. 시장에서 무엇인가를 팔았다면 그 무엇에 대한 소유권도 함께 이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거래의 상식이다. 임꺽정의 발주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디자인 X의 개발이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성춘향이 임꺽정 몰래 디자인등록을 하거나 특허권을 신청하는 것은 암묵적 합의를 지키지 않은 행위이므로 잘못이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는 생각은 창작자의 권리보호라는 명목은 좋을지언정 시장의 순리에 맞지 않아서 문제다. 오히려 시장 주체들의 상호 불신을 유발하고, 분쟁 발생의 원인이 된다. 또한 그런 생각은 모순을 일으킨다. 예컨대 디자이너 성춘향이 다른 디자이너인 장길산에게 디자인 X의 하도급을 준다면, 이제 디자인 X의 권리자는 디자인 발주 의뢰자인 임꺽정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장길산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의 명시적인 규정이 없더라도, 예컨대 임꺽정이 CI/BI 로고 디자인을 디자이너 성춘향에게 의뢰했는데 성춘향이 몰래 그 디자인에 대한 상표권을 신청하는 행위는 부정한 목적의 상표출원으로 볼 수 있다다. 임꺽정이 스마트폰 케이스 디자인을 성춘향에게 의뢰했는데 성춘향이 몰래 그 디자인에 대해 특허신청을 하는 행위는 무권리자의 악의적인 특허출원으로 해석한다. 이런 부정과 악의는 시장을 교란한다.

임꺽정과 성춘향은 발주 계약이 아니라 공동 개발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디자인 X를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여 공동으로 개발하는 비즈니스이다. 임꺽정과 성춘향은 기획을 같이 한다. 성춘향은 디자인 작업을 할 것이며, 임꺽정은 제품을 판매망을 통해 판매하고 그 수익을 성춘향에게 배분하는 형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경우에는 디자인 X에 대한 소유권을 공동 권리로 할 수 있다.

임꺽정의 영업활동으로 디자인 X가 국내에서 널리 알려졌다면 소비자는 그 디자인 X의 출처를 임꺽정으로 인식한다. 타인이 부정하게 디자인 X를 모방하는 경우에, 이 부정행위의 침해를 받은 자는 디자이너 성춘향이 아니라, 임꺽정이 되는 셈이다. 임꺽정은 부정경쟁행위를 주장하면서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힘으로 그 모방에 대처한다.

 

제1막 제3장

디자인 창작물의 완성 시점과 소유권 문제

디자인 창작물이 언제 완성되었는지 여부는 디자이너의 권리에 영향을 미친다. 임꺽정이 디자이너 성춘향에게 발주 외주를 하는 경우에 아직 디자인 창작물이 없었다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권리의 향방이 정해진다. 성춘향은 개발 중인 디자인 X에 대한 정보를 임꺽정 허락 없이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 되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기의 이익을 위해 디자인 X를 중복 판매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미 디자인 창작물이 완성되어 있고, 임꺽정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 디자인 창작물을 요청하였다면 디자이너 성춘향은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다. 이때 디자이너는 좀 더 유리한 지위를 차지한다. 임꺽정의 발주와 무관하게 디자인 X에 대한 지적소유권을 성춘향이 미리 등록해 놓을 수도 있다. 임꺽정은 디자인 X의 사용에 관한 권한(때때로 독점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디자인 X에 관련한 모든 소유권을 임꺽정에게 양도한다는 명시적인 계약 규정이 없는 한, 제삼자와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디자이너 성춘향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 디자인은 성춘향의 것이다.

 

제1막 제4장

사내 디자이너의 권리

이번에는 디자이너 성춘향이 제조사 임꺽정과 근로계약을 맺고 디자인 X를 개발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성춘향은 ‘사내 디자이너’이다. 디자인에 대한 권리는 자연스럽게 회사인 임꺽정이 갖는다. 매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디자이너 성춘향은 디자인 X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특별한 사정은 디자인 X가 회사의 직무와 전혀 상관이 없다거나, 회사가 관심을 두지 않고 사용을 거부한 경우라거나 혹은 회사의 지적소유권 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디자이너 성춘향이 마음껏 권리취득 행위를 하는 경우(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등이다.

어쨌든 이렇게 사내 디자이너의 권리가 적은 까닭은 디자인 X를 개발하는 것은 디자이너인 성춘향의 직무이며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임꺽정과 근로계약을 맺었고 또 급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디자이너 성춘향의 직속 부하인 디자이너 장길산이 디자인 X를 성춘향의 지시로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권리는 회사가 갖는다. 회사가 갖는 권리는, 특허, 디자인, 상표권과 같은 공업소유권과 저작권을 포함한다.

회사가 디자이너 X에 대해서 얼마를 보상해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발명보상금에 준해서 보상을 해야 할 의무가 회사에게 있다고 주장할 테지만, 그와 같은 경제적 이익은 디자이너 성춘향이나 장길산의 급여와 근무조건에서 상당수 실현된다. 추가적인 보상금은 정책적인 이유로 지급될 수는 있어도 당연히 지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1막 제5장

모방과 싸우는 디자이너의 명예

창작자는 자기의 공개된 작품에 대해서 남에게 알릴 권한이 있다. 이것은 재산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는 소유권은 아니다. 일종의 인격권이며 명예에 관한 권한이다. 저작권이 타인에게 양도되더라도 그 저작권을 사용하는 권리인 저작재산권이 양도되는 것이지 그 저작권을 자신이 창작했다는 사실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저작인격권). 디자인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은 이전된다. 그러나 누가 그 디자인을 창작했는지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는 자기가 회사 내에서 작업한 디자인이든 아니면 외주를 받아 남을 위해서 작업한 디자인이든 그것을 자신의 포트폴리오로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디자이너가 항상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지적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적다. 디자이너 성춘향과 디자이너 장길산이 모방에 맞설 수 있는 ‘무기’(법적인 권리)는 많지 않다. 제조사 임꺽정이나 판매자 홍길동의 경우에는 특허를 확보하고 디자인을 등록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모방을 예방하려고 노력할 수 있겠으나, 디자이너 성춘향과 디자이너 장길산은 모방을 그저 지켜봐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모방에 맞서는 또 다른 전장이 있다. 디자이너에게는 명예가 있다. 악의적인 모방에 맞서 자기를 지키는 싸움이다. 모방에 맞서 그 창작물의 오리지널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이다. 디자인은 끊임 없이 창작되고 모방되면서 발전한다. 기록이 곧 권리를 뜻하지는 않지만 디자이너의 명예를 지켜줄 것이다.

포트폴리오는 가급적 날짜를 병기한다. 디자인 창작과 관련된 거래서류, 의뢰서, 매거진 등의 자료는 버리지 않고 잘 관리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분통만을 터트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법원은 증거로 정의를 판단한다. 시장에서의 상도덕과 지켜야 할 교양과 양심은 언제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 또한 증거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설득력을 지닌다.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법적으로 유의할 사항이 있다. 성춘향과 장길산이 사내 디자이너이고, 아직 제품이 공개되지 않은 경우에는 비밀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회사의 비공개제품에 대해서 공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은 회사의 영업비밀을 침해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또한 외주 디자이너인 경우에는 발주자와의 계약에 포트폴리오 공개를 금하는 규정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제1막 제6장

다른 사람의 창작물의 이용

디자이너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서 보증을 한다. 자신의 디자인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음을 보증하는 책임이 디자이너에게 있다. 이런 종류의 보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디자인 표절 문제이다. 자신의 디자인 창작물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부정하게 모방하지 않았음을 보증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제삼자의 권리, 예컨대 제삼자의 저작권, 상표권,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보증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이런 종류의 보증을 요구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잘못된 처사는 아니다. 자신이 제공하는 재화나 서비스에 하자가 있는 경우 그 하자에 대한 담보책임을 지는 것은 시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단, 디자이너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제삼자의 권리가 있는 법이고, 우연히 발생할 수 있는 그런 법적 문제조차 디자이너가 보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내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회사의 비용으로 이런 문제를 타개한다. 외주 디자이너의 경우라면 예상하지 못한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외주 디자이너의 능력 범위를 초과하는 과도한 책임을 묻는 계약서 조항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성춘향이 임꺽정의 의뢰를 받아서 스마트폰 케이스를 디자인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케이스 뒷면에 일러스트레이션이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해서 일러스트레이터 황진이의 작품을 사용하기로 한다. 황진이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황진이가 동의하고 성춘향이 대가를 지불했다면, 황진이가 임꺽정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성춘향은 디자인 X에 황진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할 수 있다. 황진이는 디자이너 성춘향과 그녀의 고객인 임꺽정에게 디자인 X에 일러스트레이션의 사용권을 양도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일러스트레이션의 창작자가 황진이가 아니라 성춘향이라고 함부로 적으면 안 된다. 저작인격권의 침해이며, 무엇보다 염치 없는 행동이다.

 

제1막 제7장

법률 지식

우리는 지금까지 이 극장에 출연하는 등장인물들의 기본적인 ‘권리관계’를 살펴봤다. ‘관계’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 ‘권리’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지식이 필요하다. 디자이너의 작업과 관련해서는 저작권, 디자인특허(흔히 ‘디자인권’이라고 칭한다), 기술특허(그냥 ‘특허’라고 부른다), 상표권, 부정경쟁행위, 영업비밀침해 같은 것이 있다. 이들은 모두 독점적이며 남을 배제하는 성격의 권리이다.

우선 저작권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표현’이다. 저작권법은 표현한 결과물을 보호한다. 당대의 사조와 유행하는 스타일이 유사하다는 것만으로는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저작권 침해가 이슈가 되려면 표현물 자체가 유사해야 한다. 저작권은 또 모든 표현물을 항상 보호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적 혹은 예술적 범위의 독창성이 있으며 또한 독립적인 창작물이어야 한다.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은 모두 표현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이미지가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독창적인 표현물로 인정하기 어려운 사진 이미지는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독창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또한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 저작권은 국가에 신청하는 게 아니라 창작과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저작권은 법원에서 재판할 때에야 비로소 그 얼굴이 드러난다.

디자인특허는 국가로부터 15년의 독점권을 받는 권리다. 국가는 무엇에 대한 디자인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디자인 이미지뿐만 아니라, 대상이 되는 물건(물품)을 반드시 정해야 한다. 물품이 다르면 그 디자인은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특허는 기술에 관한 20년짜리 권리다. 디자인이 어떤 기능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기능 변화가 새롭다면 특허를 시도해 볼 수 있다. 3D 디자인에서는 특허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반면 2D 디자인에서는 특허 이슈가 적용할 여지가 거의 없다.

상표권은 나와 남을 구별해주는 어떤 표지에 대한 독점권이다. 브랜드, 상호, 성명, 로고, 캐릭터가 나와 남을 구별해주는 기능을 한다면 상표권은 아주 유용한 권리. 디자인특허처럼, 상표등록을 하려면 반드시 품목이나 업종을 선정해야 한다. 국가는 묻는다. 어떤 품목에 대한 상표냐고 말이다. 의류에 대한 것인지, 장난감에 대한 것인지, 주방 제품에 대한 것인지를 분명히 해서 권리를 신청해야 한다. 상표가 동일해도 품목이 다르면 서로 다른 상표권으로 본다.

성춘향의 굉장히 ‘유명’한 디자인 X가 있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디자인 X가 성춘향 것인지 쉽게 안다. 홍길동이 디자인 X를 무단으로 사용한 제품을 팔면 소비자들은 그게 성춘향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성춘향은 부정한 모방 때문에 신경증을 앓는다. 그때 요긴한 법제도가 부정경쟁방지법이다. 성춘향은 이 법률을 근거로 홍길동의 행위를 부정경쟁행위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몇 년 전 쌍방울이 속옷 디자인으로 버버리 특유의 체크 문양을 사용했다. 그러자 버버리는 권리침해를 주장했다. 쌍방울의 행위로 말미암아 소비자가 버버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오인혼동을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부정경쟁방지법에 의해 버버리 승.

한편 디자이너는 취업해서 일하고 있는 회사의 무형 재산을 함부로 가지고 나오거나 다른 사람한테 보여줘서는 안 된다. 만약 회사가 디자인 원본파일, 재료에 대한 정보, 시장조사자료, 고객 정보 파일 같은 영업자료를 경쟁력 있는 비밀처럼 여기고 관리했다면, 그건 회사의 비밀스런 재산으로 간주된다. 설령 디자이너가 관여했고 작업한 결과여도 디자이너의 것이 아니라 회사의 재산이다. 함부로 가지고 나오거나 제삼자한테 보여주면 부정경쟁방지법이 규정하는 영업비밀침해죄로 엄정하게 처벌될 수 있음을 유의하자.

 

제2막 제1장

편집디자인

이제 디자인 극장의 무대는 편집디자인실이다. 편집디자이너 성춘향은 그녀의 책상 앞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의뢰인의 비즈니스를 매력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녀는 책의 표지를 디자인한다. 그녀는 책의 속편집을 다룰 수도 있다. 단행본일 수 있고 여러 판형의 잡지일 수도 있다. 브로슈어, 팜플릿, 리플렛, 카탈로그 등의 여하한의 인쇄물일 수 있다. 편집디자이너 성춘향은 그녀의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으로 말미암아 고객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다. 그녀는 대담한 레이아웃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하는데, 특히 황진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선호한다. 황진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성춘향이 추구하는 디자인 메시지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디자이너 성춘향은 자신의 디자인을 모방하는 장길산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장길산은 낮은 가격으로 고객을 유혹하는데다가 워낙 탁월하게 모방하는 기술을 갖고 있어서 이에 대한 성춘향의 신경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성춘향은 장길산을 상대로 법적인 조치를 결심하고 전문가를 찾았다.

성춘향의 디자인은 과연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권리 관점으로 보자면 유감스럽게도 성춘향은 원하는 답을 얻기 어렵다. 편집디자인을 보호할만한 권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격다짐으로 편집디자인의 결과물에 대해서 디자인보호법이 규정하는 디자인특허(디자인권)를 신청할 수도 있겠다. 모년모월에 작업한 편집디자인에 대해서 보호해 달라는 신청이다. 그렇지만 편집디자인의 결과물은 고객의 의뢰에 따라 또 상황과 유행과 작업 의도에 따라 매번 달라지게 마련이어서 디자인특허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어떤 편집디자인에 대해서 디자인특허를 받았다 하더라도, 레이아웃이나 이미지가 바뀌어 시각적인 편집 효과가 달라졌다면 그 차이를 묵살하면서 권리주장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권리만을 생각해서 디자인의 변화를 포기할 수도 없는 문제. 변화를 거부하는 순간 성춘향은 더이상 디자이너가 아니다. 늙은 디자인은 시장에서 서서히 혹은 급격히 퇴출된다.

그렇다면 저작권은 어떨까? 성춘향은 레이아웃과 독창적인 편집 방식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답답한 답이 돌아온다. 저작권 제도는 좀처럼 성춘향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이른바 편집디자인의 레이아웃에 관련한 권리인 ‘판면권’은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장길산은 자신의 디자인이 성춘향의 디자인을 복사기로 카피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면서 성춘향의 저작권 주장을 반박할 것이다. 이런 항변은 재판관과 배심원을 설득할 수 있다. 만약 임꺽정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이것이 인정된다면 성춘향은 소송에서 패배한다.

 

“저는 성춘향의 편집디자인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성춘향이 무슨 권리를 주장하는지 모르겠어요. 저작권은 표현형식을 보호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춘향은 자꾸 컨셉을 이야기해요. 그것은 그녀의 사상이나 감정이겠죠. 레이아웃의 대략적인 컨셉이 유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의 유사한 사용은 우리 디자이너 그룹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예요. 우리 디자이너들은 리서치를 하죠. 그리고 서로서로 참조하고 또 보태고 빼면서 작업을 해요. 그저 아주 자연스러운 디자인 작업예요. 그리고 차이도 있습니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아주 작은 차이조차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보세요. 사용한 이미지가 다르고, 위와 아래의 배치도 달라요. 글자의 폰트도 다르잖아요. 저는 성춘향의 디자인을 카피한 것이 아니라, 제 나름의 독창적인 노력의 결과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방에 관련한 편집디자이너 성춘향의 신경증은 재판을 통해서는 거의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대법원 2011. 2. 10. 선고 2009도291 판결 참조). ‘권리를 주장하는 편집디자이너’의 목소리가 있겠지만, ‘자유로운 디자인작업을 주장하는 편집디자이너’의 목소리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게 좋겠가. 성춘향은 어느 순간 갑자기 뛰어난 디자이너가 된 것이 아니다. 앞선 디자이너의 노력과 성과를 학습함으로써 오늘의 편집 디자이너가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결과가 성춘향에게는 차갑게 들리고 약이 아니라 매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뛰어난 디자이너’로서의 성춘향의 지위와 명예가 뒤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디자이너의 신경증은 재판이 아니라 시장에서 고객의 신뢰를 통해 치유될 수 있다. 더욱이 디자인의 성과물은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한 개의 성과’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편집디자이너 성춘향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출처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다. 일종의 브랜드가 되겠다.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서 출처를 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만일 디자이너의 로고가 디자인 결과물에 작게나마 표시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작지 않은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일관된 포트폴리오로 관리하는 것이다. 모방은 원창작자의 시장 지위와 명예와 능력을 증거한다. 그것이 그녀의 명예임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다면 신경증의 상당부분은 사라진다. 훌륭하고 탁월한 것이 모방되는 법이다.

한편, 비즈니스 세계에서 편집디자이너 성춘향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디자이너이지 예술가가 아니죠. 그녀는 편집디자인을 누군가(홍길동이나 임꺽정)에게 납품할 것이고 사실상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디자인 모방에 따른 법적인 분쟁은 성춘향의 납품을 받은 홍길동이나 임꺽정이 할 일이지 디자이너가 직접 나설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성춘향의 편집디자인에서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타인의 사진 저작물을 허락 없이 사용하거나 황진이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무단으로 사용한다면, 편집디자이너 성춘향의 이름이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책임져야만 한다. 사실 편집디자이너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타인의 이미지 저작권이나 미술저작권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으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편집디자이너를 결심한 한 인간의 돛이자 닻이자 덫이다.

 

제2막 제2장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극장의 무대는 타이포그래피 작업실로 바뀐다. 성춘향은 타이포그래퍼라고 가정하자. 서체디자이너로 칭해도 좋다. 우리나라 서체디자인의 역사는 짧지만, 서양의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는 깊다. 그리고 그 깊이가 최근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관심과 유행을 부르고 있다. 또한 보편화된 디지털 편집문서 작업으로 말미암아 서체디자인의 수요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성춘향의 작업실에는 여러 가지 서체로 가득하다.

성춘향은 어떤 권리를 가질까? 권리보호의 관점에서는 편집디자이너보다 서체디자이너가 좀더 유리한 지위를 갖는다. 서체디자이너가 좀더 강한 권리를 갖는 까닭은 현대 서체디자인의 ‘디지털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오십보백보.

서체디자인은 디지털 파일로 귀결된다. 폰트파일로 광범위하게 유포된다. 서체디자인이 각광을 받는 까닭은 문자와의 관련성 때문이다. 그런데 문자는 인간의 의사소통과 지식 전달에 있어 필수적이다. 이런 점이 서체디자이너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또한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유리함이란 문자의 보편성에 의지하여 좀 더 넓은 수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며, 불리함이란 서체디자인의 독창성보다는 문자 사용의 보편성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유불리를 염두에 두자. 그러면서 서체도안에 대한 서체디자이너의 권리, 즉 서체디자인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따져 보자.

우선 <디자인보호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디자인보호법에 의거하여 ‘한 세트의 서체’에 대해서 디자인특허를 신청함으로써 15년간의 독점권을 획득할 수 있다. 국가가 인정한 독점권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권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함정이 있다. 첫째 ‘한 세트’라는 점이 중요하다. 한글로 따지자면 자음과 모음이 결합된 문자들의 한 세트를 국가에 제출되어야 한다. 다음은 윤디자인의 등록디자인(제30-0491893호)의 한 세트 중 일부를 나타냅니다. 즉 한 벌로서 완성도가 없는 서체, 일부 글자에 대한 서체디자인은 디자인특허를 받을 수 없다.

yun

 

두 번째 함정은 권리행사가 어렵다는 점이다. <디자인보호법> 제44조 제2항은 타자, 조판 또는 인쇄 등의 통상적인 과정에서 글자체를 사용하는 경우와 그렇게 사용해서 생산된 결과물(예컨대 인쇄물)에 대해서는 디자인특허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실상 서체디자이너 성춘향이 설령 디자인등록을 마쳤다고 해서 권리주장을 하기는 극히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자 사용의 보편성 때문이다.

모든 창작물에 대해서는 당연히 저작권의 보호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서체디자인은 저작권에 의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 대법원은 “글꼴 자체와 같은 서체 도안은 법에 의한 보호 대상인 저작물에 해당하지 않음이 명백하다”고 선언하면서 서체디자인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대법원 1996. 8. 23. 선고 94누5632 판결). 이 또한 저작권을 인정함으로써 대중들의 문자 사용이 제한되는 것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결국 타인이 서체를 모방하면 서체디자이너는 그것을 참고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홍길동이 윤명조로 인쇄물을 만든다고 해서 윤디자인연구소가 홍길동에게 권리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 가지 출구가 있기는 하다. 타이포그래피를 캘리그래피 관점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특함과 예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대법원 1998. 1. 26. 선고 97다49565 판결). 하지만 서체디자이너 성춘향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자신을 빛내며 자기 이름의 독립한 작품을 추구한다. 반면 디자이너는 고객을 빛내며 고객의 이름으로 완성품이 퍼져나가는 작업을 한다. 다만 디자이너는 완성도를 추구하고 심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혼을 닮을 뿐이다. 때때로 서체디자이너가 캘리그래피 예술작품을 남길 수는 있어도, 그것은 성춘향이 예술가로서 예외적으로 활동한 결과이지 디자이너로서의 필연은 아니다. 결국 타이포그래피는 앞서 살펴본 편집디자인처럼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진다(오해 방지를 위해서 모든 캘리그래피가 예술적 가치가 있는 저작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님을 부언해야겠다).

하지만 다행히도 묘한 길이 있다. 서체디자인은 폰트파일로 만들어지고, 이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램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게 된다(대법원 2001. 6. 29. 선고 99다23246 판결). 소비자는 자기 컴퓨터에서 폰트파일을 불러서 작업을 한다. 위법한 복제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다면, 서체디자이너는 자기 권리의 침해를 주장할 수 있다(증거수집 때문에 실제 소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어렵기는 하다).

그런데 디자인 극장에서 서체디자이너 성춘향이 서체디자인에 관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성춘향은 그런 배역을 맡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춘향은 디자인회사에 고용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체디자이너 성춘향이 <홍길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면 서체디자인에 대한 권리는 회사인 홍길동연구소가 갖고 있다고 봄이 자연스럽다. 홍길동연구소는 소비자 정우성과 편집디자이너 장길산, 그리고 서체로 뭔가를 뽐내려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인 임꺽정에게 자기 글씨체 폰트 파일을 팔려고 할 것이다. 서체디자인 극장에서는 좌우간 ‘복제된 폰트파일’이 관건이다. 이것은 컴퓨터 프로그램 관련 법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창작물에 대한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법의 영역이 아니며 그저 양심의 영역이다. 법리적으로는 서체의 무단 사용에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도, 서체가 타인의 창조적 활동으로 만들어져서 시장에서 정당하게 판매되고 있다면 이를 존중하고 적법하게 구매해서 사용하는 것이 모든 서체디자이너들이 바라는 건전한 문화일 터이다.

 

제2막 제3장

CI/BI 디자인

이 장에서 디자이너 성춘향은 CI(Corporate Identity)와 BI(Brand Identity)를 디자인한다. 그녀는 색채와 형태의 미묘함에다 스토리텔링의 힘을 결합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고민은 이 메시지에 어떻게 하면 고객과 그들의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흡인력을 부여할 수 있느냐에 있다. 사실 2D 디자이너 중에서 권리보호에 가장 자유로운 디자이너가 바로 CI/BI 디자이너이다. 권리보호는 의뢰인의 몫이지 디자이너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 작업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지만을 세심히 배려하면 된다. 디자인 결과물에 관련한 모든 권리는 의뢰인에게 넘어간다. 디자이너 성춘향에게 대가를 지불한 임꺽정의 관점과 관심사만 따지면 된다. 그러니까 이 디자인 극장에서는 디자이너 성춘향의 의뢰인인 임꺽정이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CI와 BI는 임꺽정의 비즈니스 혹은 정체성과 관련하여 나와 남을 구별시키는 식별 표지로 작동한다. 나와 남을 구별해주는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브랜드와 같다. 결국 상표법을 이용하여 권리 보호를 추구한다. 국가에 상표권을 신청하는 것이다. 디자이너가 자신이 작업한 CI/BI에 대한 상표권 등록을 의뢰인에게 친절히 안내해준다면 좋을 터이다. CI/BI가 타인의 상표권을 침해한다면 임꺽정은 그 디자인을 사용할 수 없다. CI/BI 디자인 극장에서 상표권 등록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이론적으로는 CI/BI에 대해서 디자인등록을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CI/BI의 특징은 물품과 사용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루 사용하겠다는 점에 있기 때문에, 특정 물품을 전제로 하는 디자인특허는 과유불급이다. 상표권으로 충분히 보호를 할 수 있는 까닭에, 여기에 더해 특정 물품에 대해서까지 디자인등록을 하는 것은 비용만 낭비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돈을 쓰겠다고 하면 막을 필요는 물론 없다.

CI/BI 디자인에 대해 임꺽정은 미술저작물로 보호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CI/BI가 단순한 형태와 색채에 불과하다거나 글자체의 단순한 변용이라 한다면 독립한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 경우 저작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CI/BI는 색채와 창작 도형이 결합된 디자인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미술저작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대개 CI/BI는 상표권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저작권은 이슈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표등록을 하지 않았다거나 혹은 상표권에 등재된 품목과 업종과는 다른 품목과 업종에 그 디자인을 사용하는 경우에 비로소 저작권 여부가 쟁점이 된다.

한편, 의뢰인인 임꺽정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받을 것인지, 그것이 디자이너 성춘향의 관심사일 것이다. 무형의 가치가 모두 그러하듯이 결과만 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디자이너가 아닌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말이다. 디자이너는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디자인을 어필해야 하고 설득해야 한다. 좋은 디자인을 내놓을 때까지 걸리는 노력과 노하우와 창의성에 대해 더 높은 평판과 대가를 원한다면, CI/BI 디자이너 성춘향은 결과물만 내놓아서는 부족하고, 타인을 설득하고 디자인을 빛내줄 스토리텔링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극장에서 디자이너 성춘향은 책상에 앉아 디자인을 빛내줄 몇 개의 문장을 쓰기 위해서 골몰한다.

 

제2막 제4장

캐릭터 디자인

캐릭터 디자인은 상표권과 저작권 모두 중요하다. CI/BI 디자이너의 작업은 남의 비즈니스를 위해서 작업을 한다. 그렇지만 캐릭터 디자이너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만약 남을 위한 디자인 작업이라면CI/BI 디자인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자신의 사업을 위한 캐릭터 디자인 작업이라면 디자이너 성춘향이 직접 권리보호를 챙겨야 한다. 2D 디자인 중에서 가장 세심한 권리보호가 필요한 분야가 바로 캐릭터 디자인이다.

캐릭터 디자인 비즈니스는 ‘라이센싱Licensing’을 추구한다. 디자이너 성춘향>은 자기가 디자인한 캐릭터가 날개를 달고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이 캐릭터를 통해 연결될 것이다. 명예와 이익은 이 환상을 좇아 현실화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성춘향의 캐릭터 디자인을 모방하면 어쩌지? 이것이 캐릭터 디자이너의 어쩔 수 없는 신경증이다. 성공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모방이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권리가 없다면 모방은 자유롭다. 그러나 캐릭터 디자이너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법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캐릭터 디자인은 미술저작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다. 저작권은 창작과 동시에 권리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보자면 굳이 국가에 저작권등록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라이센스 계약의 편의를 위해서 또는 혹시 모를 저작권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저작권등록을 하는 게 올바른 비즈니스 관점이다.

매우 유명한 캐릭터 디자인과 별로 유명하지 않은 캐릭터 디자인은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헬로케티, 뽀로로, 마블 히어로, 디즈니 캐릭터는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캐릭터이다. 반면 이제 막 디자인한 캐릭터는 소비자들에게 알려졌을 리가 없다. 부정경쟁방지법은 소비자를 보호해 주는 법률이며, 만약 어떤 캐릭터가 소비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면, 그 캐릭터를 함부로 사용해서 소비자들로 하여금 출처의 혼동을 일으키게 하거나 그 캐릭터의 이미지를 손상케 한다면, 그런 행동은 부정경쟁방지법에 의거해서 처벌될 수 있다.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은 유명한 캐릭터 산업을 보호한다. 어디까지나 유명해졌을 때의 이야기다.

캐릭터 디자인을 좀 더 두텁게 보호하고자 한다면 상표법을 이용할 수 있다. 캐릭터 디자인을 사용하거나 사용할 가능성이 큰 대표적인 품목을 선정한 다음에, 그 품목에 대해서 상표권을 신청하는 것이다. 경제성과 효율성을 고려할 때 캐릭터마다 권리신청을 할 필요는 없다. 상표등록을 하면 그 캐릭터가 누구의 것인지를 표시하기도 쉽고, 라이선스 계약을 할 때 상표권을 사용할 수 있어서 행정적으로도 이롭다. 또한 저작권은 70년 가량의 보호기간을 보장하지만 그 기간이 만료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는데, 상표권 등록을 해두면 반영구적으로 캐릭터 비즈니스를 보호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린다. 캐릭터 디자이너는 친절하게도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 이름을 붙인다. 이 이름에 대해서까지 세심하게 보호하려면 역시 이름에 대해서 상표등록을 한다. 캐릭터의 이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한편 캐릭터에 대해서 디자인보호법을 이용해서 디자인등록을 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실제 효과면에서는 미미하다. 캐릭터는 다양하게 자기 형태를 바꾸기 때문인데, 디자인등록은 그 형태마다 권리신청을 해야 해서 캐릭터 산업의 속성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제3막 제1장

제품디자인

디자인 극장의 무대는 제품 디자이너의 작업실이다. 디자이너 성춘향은 기술을 개발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공업미술에 몰두하는 아티스트도 아니다. 여기에 그녀의 고충이 있다. 엔지니어가 아니기 때문에 기술 중심의 사회에서는 충분한 발언권을 가지기 어렵다. 아티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할 수 없다. 게다가 성춘향은 임꺽정에게 고용된 사람이어서 함부로 끼를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성과를 올려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니까 디자이너 성춘향은 회사 생활을 하는 직원일 뿐이다. 사실 어느 정도의 지위가 있지 않는 이상 그녀 자신이 디자인에 대해서 굳이 권리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권리’가 아니라 ‘회사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회사 내의 권한과 지위를 생각해 본다면 권리보호는 디자이너의 업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디자이너에게 좀 더 큰 권한이 주어질 수도 있다. 또 설령 그런 권한이 적더라도 자신의 무지에 의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사고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여전히 법적인 지식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디자이너의 작업은 제품과 소비자가 만나는 제품 외관을 결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되므로 자칫 디자이너의 법적인 무지가 회사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음을 유념하자. 제품 디자인에 관한 여하한의 권리가 설령 ‘회사의 권리’일지언정 그걸 ‘디자이너의 권리’라고 상상하면서 각본을 짜보는 것이다.

제품 디자인이 순수하게 제품 외관의 형태에만 관련되는 경우, 우선 디자이너는 ‘디자인특허’를 생각할 수 있다. 디자인보호법이 규정하는 디자인등록을 신청한다. 15년짜리 독점권이다. 그 디자인이 새롭고 또 독창적인 것이라면 국가가 권리를 부여해 줄 것이다. 다른 디자인 분야와 달리 제품 디자인은 그 제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높은 의무가 있다. 제품의 외관 디자인은 제조사와 소비자의 심미적 소통을 규정한다. 악의적인 모방은 이러한 소통을 침해한다. 제조사는 이런 모방을 막을 책임이 있다. 제품 외관에 대한 그런 모방을 막는 권리가 바로 디자인특허이다.

디자인은 모방을 통해서 서로 참조하고 또 발전하는 것이므로 디자인에 대한 지나친 독점권 집착은 오히려 산업 발전을 방해한다고 혹자가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는 그와 같은 미메시스 예찬론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모방을 해야만 제품 디자인이 발전한다는 인과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최종 사용자를 통해 향유되는 제품의 기능적인 목적과 그 외관의 형태 디자인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성이 없다. 제품의 존재에 의해서 디자인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디자이너의 결정과 작업에 의해서 비로소 제품 디자인이 결정된다. 그리고 제조사와 디자이너는 엄청난 물량의 제품 제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반면 제품 외관의 모방은 대체로 경쟁 관계에 있는 자가 행하고 그렇기 때문에 악의적으로 이루어진다. 경쟁자는 모방을 통해 소비자로 하여금 혼동과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이런 점을 두루 감안할 때, 디자인에 대한 미메시스 예찬론은 지지될 수 없다.

제품 디자인은 종종 제품의 ‘기능변화’를 가져오거나 기술 구성의 ‘새로운 변경’을 촉발한다. 또한 제품 디자인은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구와 적용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는 형태가 아니라 기능과 재료에 관한다. 이 경우 디자이너는 ‘기술특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년짜리 독점권이다. 특허법에 기초하는 기술특허는 외관의 다르더라도 동일/유사한 기능이라거나 동일/유사한 재료의 사용에 대해 기꺼이 권리주장을 할 수 있으므로 매우 유용하다.

디자인특허는 제품 디자인의 외관이 확정되는 시점에 권리신청하는 되겠지만, 기술특허의 경우에는 제품 디자인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적극적으로 권리 신청을 검토한다. 왜냐하면 디자인특허의 경우 권리신청까지 하루이틀의 시간이면 충분할 수 있으나 특허신청을 준비하는 데에는 1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제품 출시 이전에 권리 신청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제품 디자인은 사실 공업적인 성과여서 예술적인 창작 표현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저작권이 적용될 여지는 거의 없다. 만일 디자인한 그 제품의 이름을 정하는 권능이 디자이너에게 부여된다면 상표권에 대한 관심은 필요하다.

 

제3막 제2장

UI/UX 디자인

UI/UX 디자인은 3D 디자인이 아니다. 시각 디자인 중에서도 그래픽 디자인의 한 분야이다. 하지만 디자인 극장이 UI/UX 디자이너 작업실로 바뀔 때, 앞서 살펴본 제품 디자이너의 작업실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할 수 있다. 기술특허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UI/UX 디자인에 대한 보호 방안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디자인보호법에 의해 디자인 결과물에 대해 독점권을 확보하는 방법, 특허법의 보호를 신청하는 방법, 그리고 저작권으로서 존중 받기를 바라는 방법이다. 이 세 가지 방법 모두 녹녹치는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디자인보호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물품’을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상 디자인 제도는 그 디자인을 사용하는 물품(디바이스)를 선택해야만 한다(점점 제도가 개선되고 있다). 설령 디자인등록을 했더라도 경쟁자의 디자인 모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방자도 모방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성춘향의 UI/UX 디자인을 경쟁사 디자이너인 장길산이 모방할 때에는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모티브만을 채용하면서 다른 결과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사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모방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디자인보호법이 침묵하는 영역은 생각보다 넓다.

제품 디자인처럼, UI/UX 디자인의 경우에도 특허가 중요하다. UI/UX 디자인은 디바이스에서의 기능 변화와 프로세스의 변동을 불러온다. 그런 기능과 프로세스의 변화는 새로운 서비스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성한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경험이며, 때때로 그런 경험에 소비자는 열광하고, 그에 따라 사업자는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년 UI/UX 디자인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으며, 정보통신 산업의 주요한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허는 UI/UX 디자인 자체를 보호하지 않는다. UI/UX 디자인이 가져온 소프트웨어의 기능 변화, 새로운 프로세스와 새롭게 정의된 디바이스의 역할, UI/UX 디자인에 의존하는 독창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특허의 대상이 된다. UI/UX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 작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거나 스케치할 수 있다. 온라인과 모바일 세계에서 디자이너의 상상은 곧 상업적 성공을 가져올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새로운 흥분이다. 이런 흥분이 특허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 디자이너가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기술자가 특허심사를 한다는 함정이다. 기술지식과 경험을 가진 심사관들이 신청된 특허의 ‘진보성’을 심사하게 되는데, 그들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UI/UX 디자인을 평가하는 경향을 갖는다. PC에서의UI/UX 디자인과 모바일에서의UI/UX 디자인은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르고, 기능변화도 다르며, 의도하는 비즈니스 모델도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하드웨어 관점에서 본다면 PC에서의 원리와 모바일에서의 원리가 동격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디자인의 변화를 단순한 설계변경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특허를 받기까지 매우 고단한 길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그 길을 지나는 것이 힘겨운 일이긴 해도 불가능한 길은 아니다.

디자이너 성춘향의 UI/UX 디자인이 디바이스의 통상적인 기능과 프로세스에 참신한 그래픽 디자인을 입힌 수준이라면, 즉 그냥 화면만 바뀐 것이라면 굳이 특허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그 디자인이 새로운 기능변화와 프로세스의 혁신을 불러온다면 어쨌든 특허신청을 하는 것이 좋다.

 

제3막 제3장

패션 디자인

성춘향은 이제 패션 디자이너이다. 패션 산업에서의 모방은 좀 특수하다. 제품 디자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다. 제품 디자인 분야의 경우에는 디자인은 독점될 수 있으며 모방은 단호하게 배제될 수 있다. 그렇지만 패션 디자인 분야는 전혀 다르다. 패션 산업에서는 모방 자체가 이 산업의 본질이며, 사회적인 요청이며 소비자의 욕구라고 누군가 말할 때, 그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렵다.

무릇 독점권리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자신이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쉽게 인정되는 권리가 아니다. 그 창작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새로움에 더해서 독창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만 비로소 독점권리를 얻을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데 패션 산업은 과거로부터 이 지구에 존재했던 지식과 여러 알려진 형태와 재료 그리고 종전의 디자인의 전승, 흉내, 재발견, 재조명 등의 온갖 모방이 퇴적층을 형성함으로써 발전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패션 디자인에 대해서 독점권리를 취득하고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패션산업의 특성을 부인하는 모순에 빠진다. 스타일의 유행은 패션 산업이 발전하는 동력이다. 그런 유행은 어느 정도의 모방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모방에 대한 지나친 견제는 패션산업에서 필수적인 스타일의 창작을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모방이 없다면 일부 거대 기업을 제외하고는 패션산업은 필경 활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패션 디자이너 성춘향은 그녀가 패션 디자이너인 이상 타인의 모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체념하는 편이 낫겠다. 모방에 대한 지나친 피해 의식과 신경증보다는 자기 디자인에 대한 모방의 출현이 곧 이 업계에서의 자기 신뢰와 위치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편이 오히려 이롭다는 이야기다. 좋고 빼어난 것을 모방하지 나쁘고 저질의 디자인을 모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일반 의복의 형태에 대해서는 특허권을 확보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신규성과 진보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그 형태가 종전보다 새롭다고 생각한다면 디자인등록을 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능 자체에 대해서는 디자인등록을 하기 어렵다. 형태의 변화에 대해서도 권리주장이 어렵다. 만일 디자인등록을 한다면, 직물의 패턴과 같이 평면적인 디자인등록을 하는 것이 좋다. 때때로 독창적인 패턴은 저작권 보호를 제한적으로나마 주장할 수도 있다. 패션 산업에서 특허가 예외적으로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형태를 벗어나 <기능성 제품>임을 강조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형태가 아닌 그 새로운 기능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 경우 패션 디자이너는 마치 제품 디자이너와 같은 소유욕을 갖게 된다. 새로운 원단과 재료를 개발하는 경우 특허신청을 검토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패션 디자이너 성춘향이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거나 견습생 시절에는 그녀도 앞선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모방하고 참조했을 것이다. 누구나 신출내기 시절이 있다. 매우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다고 해서 모방을 견제하는 것은 교육과 전승을 막는 행위이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방법이 있다. 디자인에 대한 신용을 브랜드에 대한 신용으로 바꾸는 것이다. 브랜드 전략이며 브랜드에 대한 법적 보호를 통해서 디자인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는 방법이다. 상표권은 패션 디자이너의 거의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해외에서든 그러하다. 해외 비즈니스를 전개하려면 당연히 그 나라에 상표권을 신청해야 한다. 패션 디자이너에게 상표권만큼 중요한 권리가 과연 있을까요?

상표권을 취득할 때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상표는 글로벌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면서 영문 브랜드의 보호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로고가 있는 경우에는 그 로고에 대해서도 상표권을 취득한다. 단순히 현재 진행하고 있는 품목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패션산업은 확장성이 강하기 때문에 연관품목이나 미래의 품목까지 고려한다. 예컨대 현재는 여성복만을 디자인하고 있더라도, 신발이나 모자를 포함한 의복 전체, 가방이나 지갑류, 선글라스, 시계와 귀금속제 액세서리, 비귀금속제 액세서리, 의복 도소매업 등을 두루 고려할 필요가 있다.

*

**

***

 

LSD

 

비틀즈의 <루시 인더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 집에 와서는 샤워하고 어슬렁거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왜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생각나서 불러봤는데, 오랜만에 이 노래나 번역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후다닥 번역해 봄… 정확한 산문 번역은 중요하지 않고, 이 노래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흐트러진 서사와 시적인 느낌의 번역이 어울릴 것 같아서…. 이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은 알고 있어서 LSD 느낌도 있어야 하고, 어린 아이 그림 느낌도 있어야 하고.. 뭐 이렇게 번역했다. 몇몇 단어(예컨대 diamonds)는 더 강한 이미지를 위해서 옷을 벗고 알몸이 됐다.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Picture yourself in a boat on a river

강물 작은 배 위에 있는 너를 그렸구나

With tangerine trees and marmalade skies

오렌지 나무도 있고 하늘도 오렌지 색이네

Somebody calls you, you answer quite slowly

누군가 너를 부르잖니. 넌 아주 느리게 대답하네

A girl with kaleidoscope eyes

다채로운 눈을 가진 여자 아이

Cellophane flowers of yellow and green

노랑이며 초록이며 셀로판 꽃들이

Towering over your head

네 머리 위로 솟아올라서

Look for the girl with the sun in her eyes

눈 속에 태양이 들어 있는 여자 아이를 찾았어

And she’s gone

그 아이는 가 버렸네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

Follow her down to a bridge by a fountain

이 강물의 샘 근처 다리까지 그 아이를 따라가니

Where rocking horse people eat marshmallow pies

사람들이 장난감 목마에 앉아 마시멜로 파이를 먹는 곳

Everyone smiles as you drift past the flowers

네가 꽃들을 스쳐 지나니 사람들이 다 웃잖니

That grow so incredibly high

어찌 저리 커졌을까 저 꽃

Newspaper taxis appear on the shore

신문지로 만든 택시가 강가에 나타나서는 말이야

Waiting to take you away

기다렸다가 너랑 같이 사라질 거야

Climb in the back with your head in the clouds

넌 등으로 오르는구나 구름 속까지 네 머리는

And you’re gone

너는 가 버렸지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

Picture yourself on a train in a station

역에서 기차를 탄 너를 그렸구나

With plasticine porters with looking glass ties

유리 넥타이를 맨 짐꾼이 점토꾸러미를 들고 있네

Suddenly someone is there at the turnstile

갑자기 누군가 회전문 앞에 나타났네

The girl with the kaleidoscope eyes

다채로운 눈을 가진 여자 아이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저 하늘 속에 빛나는 루시가 있어

*

**

***

Nature에 대하여

미래의 딸에게:

(언젠가 인간과 역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나이가 될 때)

오늘 아침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네가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씻고 혼자 아침 밥을 먹고 스스로 옷과 가방을 모두 챙긴 다음에 혼자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단다. 학교에서 장기자랑 같은 게 있어서 일찍 가서 준비해야 한다며 말이지. Your my sunshine을 불렀을 게다. 너와 초상화(민주)는 노래를 불렀고, 김미국(여령)은 피아노를 쳤으며, 수예는 우쿨렐레를 연주했을 거야. 기억이 나니? 아빠는 가방과 첼로를 메고 너 혼자 등교하는 것이 걱정돼서 눈 부비며 잠옷 차림으로 자동차 키를 돌렸단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십 분 정도 일찍 등교했다. 피곤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 KBS홀에서 <베토벤을 만나다>라는 공연을 관람해서 평소보다 많이 늦게 잤거든. 오늘 있었던 일은 이렇게 대충 기록해 두고, 이제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 이 이야기는 아빠가 요 몇 년 동안 깨달은 것인데,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쓸모있는 이야기란다. 이 글을 읽을 즈음에는 이미 너도 제법 많은 언어를 알게 돼서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또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겠지. 중학생이 되었을지 고등학생일지 모르겠구나.

오늘 아빠가 말하고 싶은 단어는 딱 한 개란다. Nature라는 영어 단어야. 엄청 쉬운 단어지. 그런데 이 단어에 우리 인류의 정신세계사의 핵심이 들어 있단다. 이 단어는 이미 너도 잘 알거야. <자연>이라는 단어를 먼저 생각하겠지. 그래 <자연>이란다. 또 무슨 뜻이 떠오르니? <본성>이라는 낱말을 떠올릴 수 있다면 네가 그럭저럭 영어 공부를 한 것이다. 영어 사전을 한 번 찾아보거라. 그밖에도 여러 낱말들이 있다. 이것들을 아빠가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고, 그럴 능력도 안 되니까. 딱 이 두 개의 뜻, <자연>과 <본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우주 만물을 지칭하는 자연을 영어로 Nature라고 말하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Nature라고 말한단다. 인간은 자연과 분명히 다른데도 인간에 대해서도 Nature가 되는 것이지. 우리 한국어로는 <자연>이라는 낱말과 <본성>이라는 단어가 명확히 구별되어 있음에도, 영어로는 그냥 한 단어 <Nature>가 된단다. 왜 그런지를 네가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옛날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자연과 인간을 그다지 구별하지 않았단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것이고, 인간의 뿌리를 우주 삼라만상의 자연에서 찾았지. 이런 생각은 동양과 서양에서 큰 차이가 없었어. 서양사람과 동양사람의 DNA가 다르지 않을 테고, 인류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하게 진행됐거든.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자연과 인간은 그다지 크게 분리되지는 않았지. 인간을 특별하게 생각하기는 했어도 자연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지는 않았어.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연을 닮아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자연을 닮으면 좋은 것이고, 자연을 닮지 않고 인간 스스로 유별나게 톡톡 튀는 모습은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더라.

서양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한다. 그리스 철학자 중에는 탈레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피타고라스 등등의 철학자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들 철학자들은 자연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가장 중요한 지혜로 삼았어. 그 후 철학자 중의 철학자인 플라톤이 등장하는데, 플라톤 철학을 다소 간단하면서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연의 본래의 모습>을 가장 높은 아름다움/올바름/좋음으로 봐서 인간이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어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이었단다. 우리 인간이 자연을 잘못 이해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 같더라. 인간의 <본성>은 <자연>이 선물한 것인데, 그 진짜 본성에서 벗어나서 자연 그 자체로 분리되기 때문에 인간사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고대의 철학자들은 생각하더군.

플라톤의 자연 그 자체가 바로 <이데아>가 될 터인데, 몇 백 년이 지난 다음에 이 Nature, 그러니까 이데아, 즉 자연 그 자체가 더욱 강력하고 신성한 존재로 바뀐단다. 자연 중의 자연, 모든 자연 의 근원이 되는 자연, 곧 신God의 등장이었지. 기독교 사회가 되었어. 대략 플라톤 시대로부터 700년 정도 걸린 것 같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를 <예수>로 바꾸면, 대체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가 되지. 기독교의 교리가 플라톤 철학을 대체하는 성공했고, 그 시대를 “중세”라고 부른다. 이것은 너도 알 것이며, 그 이전을 “고대”라고 부르고.

중세는 자연 중의 자연, 모든 자연의 근원이 되는 자연, 절대자의 섭리가 온통 지배하는 시대였다. “섭리”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단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 법칙은 언제 어디에서든 항상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를 뜻한다고 보면, <자연>이라는 단어는 <필연성>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가 된단다. 좀 어려워졌구나. 좀 쉽게 설명하자면, 누군가 노예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자연 중의 자연(절대자)이 그렇게 만든 것이고, 왕으로 태어났다면 역시 위대한 자연이 그렇게 선물한 것이라는 이야기란다. 노예의 본성과 왕의 본성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결정했다는 점이지. 인간은 함부로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는 이런 자연의 결정 앞에서 함부로 대들 수도 없었지. 왕은 왕이고 노예는 노예였어. 누군가 왕따를 당하면 왕따를 당하도록 자연이 정한 것이므로 어떻게 제대로 저항할 수 있었겠니. 이런 시대가 자그만치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단다. 그래서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종교는 신을 칭송하고 찬양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사람의 죽음조차 자연이 정한 본성에 따라 죽는 것이지. Nature(자연)은 Nature(본성)이란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딸아, 서양과 동양을 함부로 구별하지 말거라. 지구촌에 사는 인류는 그다지 차이가 크지 않아요. 앞에서 설명한 역사는 서양만 그랬던 것은 아니란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동양에서도 자연과 사람을 그다지 분리하지 않는 경향은 어디에서나 있었지. 천륜을 지키는 것이 인륜이었으며, 하늘의 도는 인간의 도여야 했단다. 동양사람들도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기를 노래했으며, 자연은 언제나 신의 모습으로 비쳐졌단다.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모두, 자연의 섭리를 절대적으로 따랐고, 자연스럽게 운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처럼 생각했단다. 그래서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노예는 노예며, 왕은 왕이었단다. 이것은 동서양에 차이가 없었지. 중동지역에서는 지금까지 1500년간 이슬람교가 지배해 왔다. 이슬람교도 그 뿌리가 기독교와 맞닿는 부분이 있는데,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자를 숭배해야 하며, 절대자 이름으로 교육되는 교리를 인간이 함부로 대들 수 없었지. 말씀이 곧 자연이었으며, 자연이 곧 말씀이었으므로, 지구 전체가 자연이 지배하고, 자연을 인간의 본성으로 삼게 되었단다.

그런데 아주 기묘한 일이 서양에서 발생했지. 자연에 맞서려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 출현했단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힘이 있고, 그 생각하는 힘은 왕과 노예의 차이가 없으며, 누구나 공평하게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생각하는 힘은 자유로운 상태여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가 필수적이지 않겠냐는 것이지. 운명은 하늘의 결정이므로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아주 오랫동안 당연히 생각해 왔는데, 인간 스스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 거야. 그러려면 역시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했지. 자유가 있어야만 생각하니까. 노예는 생각을 못해. 생각할 여유/지식/경험이 없거나, 생각을 하면 더 괴롭거나. 어째서 괴롭겠니? 자유롭게 생각하면 의지가 생기는데, 노예에게는 순종하는 거 말고 의지가 허락되지는 않으니까. 다시 다르게 말해 보면, 자유가 있어야만 더 나은 운명을 만들고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길 테니까. 자유가 없으면 의지도 없고, 의지가 없다면 자유은 자연에 승복하지 않겠니.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창조한 절대자가 그런 자유의지를 선물한 것이라고 확신했단다.

지금이야 이런 생각이 당연하잖니? 인간의 자유는 오늘날 상식이 됐고, 헌법의 권리가 되었으며, 인권이며, 누구나 자유의지를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지. 하지만 유럽에서 몇 백 년 전에는 이런 상식적인 생각이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사상이었어. 그런 생각의 거대한 흐름을 계몽주의라고 부른단다. 아빠가 좋아하는 칸트 할아버지는 계몽주의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아빠는 메모하고 있지. 어쨌든 계몽주의가 없었다면 현대의 인류는 없었다. 계몽주의는 인류에 빛을 선물했는데, 그 빛은 우리 인간이 <자연>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벗어날 수 있음을, 자연이 정한 운명이라는, 신이 결정한 본성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인간 스스로, 인간 한 명 한 명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빛이었어. 요즘 들어서 뭘 좀 아는 척하는 사람들 중에는 함부로 계몽주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다시 말하지만 계몽주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인류의 번영은 가능하지 않았을 거야. 계몽주의는 자연이 정한 운명들, 신분이나 계급 같은 것의 권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칭송하고,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자극하고 보장해줬단다. 바로 그것이 서양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거야.

인간이 자기 본성, 즉 운명에 저항하는 역사는 쉽지만은 않았어. 자연이 완벽하게 인류를 지배하는 세월이 천 년이 넘었으니까 어떻게 수십 년만에 간단하게 바뀌겠니. 수백 년이 걸렸고, 그 수백 년 동안 혁명과 내전과 전쟁이 발생했단다. 수백만, 수천 만명이 죽었다. 자유를 위해서. 자연이 정한 본성에 지지 않으려고. 자연이 정한 본성이란 무엇이겠니?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힘든 것이란다.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 같은 것이란다. 우리 인류는 “자연이 정한 본성에 따라”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지. 차별은 당연했고, 심지어 함부로 사람을 죽였어. 그러나 “자연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오랜 싸움 끝에”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에 따른 차별이 곳곳에서 추방됐단다. 자유에 대한 대가로 수백, 수천 만 명이 죽어가면서 말이지. 

한국의 역사 대부분은 동양의 다른 나라처럼 자연이 완벽하게 지배한 역사이며, 개인에게 허락된 자유는 아주 적었던 것 같다. 신분을 넘어서는 개인의 자유란, 개화 이전에는 거의 없었지 않았을까? 개화 이후에 수입되었으며, 그 역사도 고작 100년에 불과하지. “개화”란 무엇인가? 역사 시간에 배웠겠지만, 아빠는 좀 다르게 생각한단다. “자연에 맞서기 시작하는 계기”로 해석하고 있지.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이 정한 차별을 인식하고 맞서기 시작하는 때로 해석하는 아빠는 지금도 개화기라고도 생각해.

그런데 자유와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나올까? 서양에서 “이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그것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다. 자유와 감정은 어울리지 않지. 자유와 이성이 어울리는 것인데, 많은 한국인이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더구나.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은 한국보다 사정이 훨씬 좋았지. 더 일찍 개화했으며, 더 많은 사람이 서구의 정신세계를 받아들였어. 그러나 당시 일본의 권력자들은 서양의 정신보다는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결국 서양의 정신세계는 추방되고 그 껍데기만 채용돼서 군국주의의 길로 타락했다. 전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는데, 서양의 진정한 힘은 발달된 기술과 경제력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정신이란다. 모든 시대에서 개화란 물질이 아니라 정신임을 네가 깊이 생각해 주기를 아빠는 바라는구나.

오늘날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테러를 일삼고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있잖니. 이슬람교가 나빠서는 결코 아니지. 세속화되지 않은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자연이 지배하는 사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자연(절대자)이 정하는 섭리가 여전히 강하지만, 인간 개인개인의 자유가, 자유의지가 21세기 맞지 않게 지나치게 연약하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지. 자연이 강하면 자유가 약하고, 자유가 약하면 대다수의 인간은 폭력에 노출된단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이며, 동양에서도 그랬고, 서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는 아직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더구나. 하지만 지금의 이슬람교보다 더 무서웠던 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도 언젠가는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가 자연에 맞서면서, 종교가 정한 본성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아빠는 생각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

아빠가 언젠가 네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연의 반댓말은 인간이 아니야. 자연의 반댓말은 “자유”란다. 어째서 인류가 곳곳에서 다양성을 옹호하며 자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으며 싸우고 있는지를 네가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네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본성이 있더라도, 혹은 네가 선택하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네게 있을 것이고, 그 힘을 이용해서 지혜롭게 맞서거라. 그 힘은 우리 인류 조상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백 만, 수천 만명이 생명을 바치면서 기어이 지켜낸 힘이지. 그것은 “너의 자유의지”란다.

*

**

***

 

19대 대선 공약같은 거 보지 말자

지난 번에 문재인 후보의 제1 공약인 <공공부문 81만개 일자리 창출> 공약이 얼마나 헛된 공약인지, 산수 착오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했어.일자리 “창출”, 이것은 없던 것을 만드는 거겠지. 그것도 공공부문에서 말이야. 81만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나는 사실 이것저것 후보들의 공약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했어. 주제 파악하라고?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니? 착각도 자유셔. 그래,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 범인이 함부로 정책 평가를 하는 게 웃긴 일이긴 하지. 정책을 만드신 분들도 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만든 거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돌아다녀 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00명이 아니라 거의 삼십 만 명 수준인 것 같고, 모두가 다 정치 전문가이며, 하나 같이 정책통이지. 뭐, 권위랄 게 있니. 이 직접 민주주의의 거대한 연회장 같은 곳에서는 모두 정당인인 셈이야. 인물이 너무 많다 보니 실력이라는 것이 하찮게 돼버렸어. 그래서 나보다 못한 범인이라도 어딘가에서 의자 하나 넉넉히 차지할 수 있고 제법 목소리도 낼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책 팸플릿이나 읽고 끄적이는 거였는데. 그것도 이제 그만 하려고 해.

한국의 위대한 정당인들은 별로 정책에 관심이 없어. 정책은 지극히 냉정한 작업의 결과이며 가장 이성적인 성과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5000천만이라는 숫자가 장난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 수많은 정치인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을 선호하지.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중요하지. 정책이 무엇이든 승리만 하면 돼. 정책에는 관심이 없어. 정책을 예쁘게 치장한 인테리어는 좋아하지. 번지르르한 모델 하우스에 감탄하겠지. 하지만 화려한 장식물 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재료와 구조를 좀처럼 걱정하지는 않아. 조화와 환경은 더더욱 관심 밖이지.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니까. 사람들이 이러하니, 정책 만드는 일도 그럴듯하게만 하면 되는 일이야. 바보야,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다 쓸모없는 일이야. 선거는 분위기야. 대중이 알아서 환호하게 뜨겁게만 만들면 돼.

그래서 요즘 나는 시끄러운 창문을 닫았어. 그냥 플라톤의 책이나 읽으면서 국가에 대한 해묵은 공부를 해. 나 같은 재미 없는 사람에게는 이게 훨씬 재미있더군.

내가 문재인 후보 공약 하나 비판했어. 그런데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 공약을 다루지 않으면 매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어. 그렇지만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자괴감이 커서 몹시 귀찮아졌어.

간단하게만 말하자.

안철수 후보의 공약순위 1이 이거야. <튼튼한 자강안보를 토대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온갖 좋은 표현은 다 모아 놨어. 첨단 국방력 건설로 강력한 자강안보 구현, 한미동맹 강화와 동북아 평화체제 병행 추진, 4자회담과 6자회담 재개 추진, 평화외교-통일외교-선진통상외교 추진, 5. 평화로운 과정으로서 통일 추진. 뭔가 많이 정리했어. 그런데 참 이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 첫째 공약순위 1번인데도 신선함이 대단할 정도로 전혀 없다는 뻔뻔함, 둘째, 이렇게 구태의연한 정책을 공약순위 1번으로 올려놓는 대범함, 셋째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반도 정세가 이토록 위중해서 높은 수준의 창의성과 전략이 필요함에도 나사가 여러 개 빠진 것처럼 상호 논리 모순되는 정책을 명료한 방향 없이 나열하는 몽롱함. 어떤 교수가 관여했겠지. 어떤 높은 정치관료가 지시했는지도 모르지. 이거 하나만 봐도, 적어도 <정책과 전략>에 관해서, 안철수 후보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문재인 후보 주위에 권력을 애호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모여 들어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별로 없다는 속담을 인용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어. 무능한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면 유능한 사람의 존재가 희석화되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누가 봐도 세가 부족한 안철수 후보 캠프라면, 적어도 소수라면, 그 소수는 정예가 돼야 하지 않겠어? 정책집을 보면 참 한숨이 나와. 어쨌든, 공약 1순위에서 정책을 치장하는 수사를 지워버리고 간명하게 메시지를 정리하자면 이 정도가 될 것 같군. 친미자주. 강력한 안보, 유연한 외교, 항구적 평화.

심상정 후보. <노동이 당당한 나라>,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 <노동존중 정부로 국민의 삶을 바꾸겠습니다.> 뭔가 멋져 보이지만, 운동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나 할까. 기본적으로 운동권 출신 정당은 어디까지가 국가의 한계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해. 국가의 한계, 그 지점이 좌파의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거야. 그래야만 그들의 습관적으로 고안해내는 “소비에트적 발상”, “소비에트적 정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들은 국가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 국가가 어떻게 개인과 시장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니? 국가를 그렇게 (의도하지 않게) 빅브라더를 만들려는 관념과, 좌파 특유의 개인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어째서 보지 못할까?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국가의 강력한 법률의 규제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야. 폐지, 금지, 제한, 의무, 보장 등이라는 단어들은 모두 국가의 강제권한을 발동하는 것을 전제로 해. 나로서는 정의당의 빈곤한 상상력과 빈약한 현실성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 뭔가 보통사람들, 월급을 주고 월급을 받는 보통사람의 인생이 ‘이론적으로만’ 취급된다는 생각도 들어. 시장과 국가는 어떤 관계일까? 개인의 인생과 국가의 역할은 어떤 관계일까?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 올바름에 대한 견고한 태도야말로 심상정 후보 캠프의 빛나는 장점이지만, 이 장점은 더욱 빛날 수 있지 않을까?

*

어쨌든 한국사회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우리 어린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있으니까.

**

***

19대 대선 공약 좀 보자(1)

이제부터 몇몇 후보 대선공약을 평가해볼래. 그냥 하는 거야. 특별한 목적 없이.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책/공약이 궁금하니까. 누가 당선되든 어떻게 되겠지. “국가는 어디까지 역할을 해야 하며, 어디가 한계인지”에 관한 국가관이랄까 국정 운영의 방향에 관한 철학이랄까, 그런 게 별로 없어 보이더군. 공약이 뭐 아이디어 수첩이니. 문재인, 안철수, 문재인, 안철수, 심상전, 문재인, 안철수 식으로 따져보고 싶어. 홍준표와 유승민을 보기 싫어. 국정운영 실패에 대해 책임을 한번쯤 크게 져야 하지 않겠니. 먼저, 문재인. 기호1번.

*

문재인 공약, 이것이 문제이다(1)

문캠프의 공약 1호는 이거야. 일자리를 책임지겠다. 어떻게 책임지지? 이렇게 하겠다는군.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개 창출>, 이거 대체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어. 그것도 공약 1호야. 젠장, 아주 기초적인 산수가 잘못됐어. 소요 예산의 오차만 42조원이야. 실패!

우리 다 같이 생각을 해 봐. 공무원이 아닌 수많은 국민들이 있어. 이런 국민들은 이런저런 아주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겪어. 시장은 냉정해서 서슬퍼런 구조조정이 있고, 많은 사람이 쓰러지며 낙오자가 생기지. 어쩔 수 없어. 많이 창업하고 많이 망하지. 그러고는 다시 뭔가를 도모하고 재기하고 아주 열심이야. 그런데 어떠니? 공무원은 그런 게 없어. 쫓겨나지만 않으면 시장에서와 같은 실패가 없지. 거기만 안전지대야.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미친듯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거겠지. 일자리 창출은 이런 시장에 관한 정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개 창출이라. 모두 공무원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공공부문 비정규직? 낮은 임금? 통계적으로만 의미있는 그런 일자리?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에 대한 소요예산은 5년간 21조원이라는 거야. 도대체 누구의 산수 계산이냐. 일자리는 계속 유지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지출된 급여는 누적될 것이고, 재정지출은 더 커지겠지? 막말로 4년간 공약을 안 지켰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막판 2022년에 81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볼게. 이렇게 하면 산수도 쉬워지고 또 재정지출을 줄일 수도 있으니까. 21조원을 81만원으로 나눠봤어. 연봉 2,600만원이군. 아하, 이런 계산이었구나. 그러니까 문캠프 공약 1호은 4년간 지키지 않다가 만판에 지켰을 때, 연봉 2,600만원 일자리 81만개야.

자, 그러면 81만을 5로 나눠. 162,000이야. 이제 본격적으로 따져볼 거야. 이 공약을 설계한 사람은 2,600만원 정도의 연봉이라면 좋은일자리라는 관념이 있을 거야. 일단은 인정해 줄게. 문제는 공약설계자가 산수를 못한다는 거야.

2018년에 채용한 162,000명. 2600만을 곱해. 4.2조원이야. ㅋㅋㅋ선관위 문 캠프 공약 봐봐. 매년 4.2조원이 소요된다고 하잖아. 나, 너무 정확하게 맞힌 거 아니니.  그런데 2018년에 채용한 사람은 2019년에 모두 짤라버려? 너는 사람을 그렇게 쓰니? 모두 사표내? 직장이 그리 우습니? 2022년까지 근무한다고 봐야겠지. 그러면 임금이 5년간 전혀 오르지 않는다는 전제로 4.2조원*5가 돼. 그래서 21조원이지. 자, 162,000명이야. 81만명이 아니라.

그러면 2019년에 다시 162,000명을 채용해야 해. 그러면 다시 4.2조원, 그런데 2018년에 채용한 사람이 또 있겠지. 다시 4.2조원. 더하기 문제야. 8.4조원이 소요돼.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2020년에는 12.6조원. 계속 누적지출이 생기겠지? 이거 간단한 산수잖아. 표로 보여줄게.

  2018 2019 2020 2021 2022 합계
2018(162,000) 4.2 4.2 4.2 4.2 4.2 21
2019(162,000) 4.2 4.2 4.2 4.2 16.8
2020(162,000) 4.2 4.2 4.2 12.6
2021(162,000) 4.2 4.2 8.4
2022(162,000) 4.2 4.2
81만명 일자리 재정지출 합계 63조원

*

2022년에 모두 해고되는 것도 아니잖니? 그러면 재정지출은 계속 누적될 거야. 연봉 인상이 당연히 되겠지. 그러면 재정지출은 더 커질 거야. 사업해본 사람은 알지.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만 해도 돼. 사람을 한 명 채용하면 연봉만 들지 않아. 책상도 컴퓨터도 있어야 하고 공간도 시설도 필요하지. 세금과 연금과 복지비용까지. 뭔가 부대비용이 꽤 들어. 일은 해야 하니까. 그러면 또 예산이 커질 거야.

그러니까 문 캠프 공약 1호를 지키려면 63조원으로도 부족해. 거의 80조원은 넘지 않을까? 그런데 공약집 소요예산은 21조원이라는 거야. 공약집에서 어째서 21조원이 나온 것인지는 위에서 쉽게 추리해냈어. 이것은 너무 심한 오류잖니? 이런 공약 지켜지지 않겠지. 지키면 안 돼.

*

국가는 돈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국가는 인프라로 말해야지. 더 나은 공공 인프라를 위해서 공공부문을 강화하겠다는 것과, 일자리 창출은 직접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해.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니까. 공공부문을 강화하다 보면 거기에서 일자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원래부터 시장에 있던 일자리가 공공부문으로 교체된 것일 수도 있어. 그것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분류하면 안 돼. 일자리 정책은 일자리 정책이고, 공공인프라 정책은 공공인프라 정책이야. 그렇게 분별을 해야만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거라고 나는 생각해.

결론적으로 문캠프의 공약 1호는 아주 안 좋아. 이행방법이 없어. 과연 좋은 일자리인지도 의심스럽고. 다른 공약도 읽어봤는데, 뭔가 시장을 활성화할만한 정책은 보이지 않네. 문 캠프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였을텐데, 그 중에 진짜 전문가는 적다는 거겠지. 그런데  후보라면 이 정도는 생각해서 공약의 문제점을 파악했어야 하지 않을까.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돼서 성공하려면 주위 참모들이 탁월해야 할 거야. 거꾸로 참모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잘못/어설픈 정책을 제안될 때, 대통령이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설득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또한 결국 정책은 관료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 같애. 이 공약 1호를 분석하다 보니 그런 점이 염려되는군.

*

다음에는 안 캠프 공약을 한 번 거칠게 다뤄볼까 해.

*

**

***

19대선거벽보 촌평

19대 대통령선거가 시작됐다. 벽보가 나왔다. 어, 이거 재밌네. 안철수 후보 벽보가 아주 흥미롭잖아. 일단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어쩐지 우스꽝스럽고 지지자를 불안하게 만들지. 반대자는 신났다고 조롱하고 말이야. 난, 이거 그냥 재밌어. 상식과 관습에 어긋나는 표현이, 이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는 거라면, 재미로라도 분석해 볼 만하지.

대통령선거 벽보. 일반인의 상식은 이런 거야. 이미지 아래에 기호와 벽보가 들어가지. 통상 후보의 소송 정당 이름도 들어가. 세로 쓰기를 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우측에 새로로 이름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패쓰.

개그맨

*

그런데 어제 공개되었던 19대 대통령선거 벽보는 이랬어. 일단 주요정당의 후보 5명만 보자고. 탁 봐도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의 포스터가 다르네. 어, 이거 모냐. 장난하냐?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서 장난 아닌 반응이야. 물론 대개는 비난과 조롱이었지. 지지자들은 불안해 하더군. 이게 모냐고. 아마추어처럼 말이야.

19대대통령선거 포스터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이거 완전 성공이잖아. 상단에 기호와 이름이 들어가니까 아주 간단하게 차이를 표현했어. 다섯 명의 후보가 가로로 나란히 붙게 된다면 이득을 보겠지. 나란히가 아니라 타일식으로 벽보가 붙게 된다면 특별해 보이지는 않겠군. 하지만 대체로 가로로 나란히 벽보가 붙게 되고, 그러면 아주 눈에 띄게 될 거야. 후보가 15명? 유권자는 이 다섯 후보를 볼 때와 나머지 10명의 후보를 볼 때의 마음 상태가 달라. 좀 자세히 보자.

안철수

‘안철수’에서 ‘수’가 끝에서 좀 짤렸어. 숫자 ‘3’도 그렇고. 이런 여백없는 레이아웃과 배치는 편집 디자이너들이 좋아하는 관능적인 표현이지. 후보의 이름도 조금 잘라버릴 정도의 과감함이라면 양손 주먹도 조금 잘라먹을 수도 있지 않겠어? 다 보여주지 않아도 돼. 주먹 쥐고 있다는 의미는 사라지지 않잖아. 주먹을 좀 잘라먹으니깐 덕분에 <국민이 이긴다>라는 메시지를더 키울 수 있었어. 모든 벽보는 인위적이게 마련인데, 후보이름 글자가 다소 희미하게 보이도록 하고, 뒤에 그림자도 그대로 놨두니까 현장감이 살아났어. 대신 <국민이 이긴다>라는 메시지로 정당소속과 촛불민심 모두를 간명하게 나타냈어. 이거 보통 수완내기가 아니야. 디자이너는 (습관적으로) 생각했을 거야. 독자가 이미 다 아는 것을 굳이 부연해서 더 설명할 필요 있나요?  본질만 남기고 다 없애자꾸나. 어쨌든 이런 기이한 결과물이 나오려면, 기획자와 디자이너 모두 확신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소통이 재빨라야하지. 그러려면 관여자가 적은 게 낫겠지. 사람이 부족하니까 더 나은 결과를 냈다는 생각이 드네. 물론 익숙한 형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본래 안철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고 비난하겠지. 후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렵고, 전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 보자. 사람들은 은근 보수적이어서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도를 별로 안 좋아해.

*

이번에는 문재인 후보의 벽보를 봐볼까? 왼쪽이 이번 포스터, 오른쪽이 18대 포스터. 전체적으로는 18대보다는 19대가 더 낫다고 봐. 18대 포스터는 ‘나, 잘 생긴 남자거든’ 정도 말고는 어필하는 게 없어. 대통령 선거는 인물 뽐내기는 아니니까. (우리 명박 각하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니?) 이미지와 서체, 좋아졌어. 단, 너무 정답 같다는 게 흠이라면 흠.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과 후보의 얼굴 표정에 어울림이 없다는 생각도 들어. 웃는 얼굴과 메시지가 잘 매치가 안 되네. 메시지만 놓고 본다면 ‘든든한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지지자들의 강박관념이야. 그냥 ‘나라를 나라답게’, 이렇게 간단한 문구가 나았을 텐데.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아래에 보이지도 않는 글귀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는 촌스럽게 모니. 아마 적지 않은 사람이 이 벽보에 관여한 것 같아. 그 중에는 정답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고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지. 자칭타칭 전문가가 많은 곳에서는 정답 비슷한 결과가 나오게 마련. 모험과 새로운 시도는 조직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기각되거든.

*

이번에는 홍준표 후보와 유승민 후보의 벽보를 봐 볼까. 진보는 분열해서 문제라고? ㅋㅋㅋ 보수가 분열하면 이꼴 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벽보만 봐도, 얘네들 되게 초라해졌네. 라는 생각이 물씬물씬 풍기네. 이 두 벽보만 놓고 본다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에게 붇고 싶네. “당신 능력이 몬데요?” 안 궁금해요. 반면 홍준표 후보의 “지키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 이거 참 재밌네. 바로 옆에 기호 1번 문재인 후보잖아? 그러니까 홍준표의 메시지가 보수층 유권자에게 어필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유승민 후보 옆에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잖아? 그러니까 유승민의 메시지가 죽어버려. 디자인은 희망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작업이야. 이때 디자인은 그것의 앞뒤와 좌우 옆도 함께 봐야 해. 결과적으로 유승민 후보의 벽보 디자인은 보수층 유권자를 어필하기 쉽지 않을 거야. 홍준표 후보의 포스터가 여러 모로 웃기기는 하지만, 유승민 후보보다는 백배 낫다고 본다.

*

다음은 짜자잔.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 이번에는 완주할 것이라고 본다. 완주하지 않을 리가 없다. 벽보 구도와 이미지, 물씬 풍기는 감성. 난 마음에 들어. 멋쟁이 사진이야. 그런데 말이야.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야. 이것은 많은 사람이 착각을 하더군.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야. 감성은 부족해도 돼. 의미를 살려야지. 그런데 어째서 의미가 살지 못할까? 추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메시지의 추상성은 그대로 둔채, 감성만 말랑말랑하게 하면 모해? “노동이 당당한 나라”,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 이게 모니 ㅠㅠ. 이런 건 진보가 아니잖아. 먹물이지. 추상에서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감옥에서 빨리 나오라고요. 그냥, 예전처럼 했으면 좋겠어. 불판 갈아버리겠다거나, 그냥 욕을 해. 그렇게 해서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해. 이런 말랑말랑함에 만족하는 거니?

심상정

*

그냥 여기까지, 완전히 재미로다가 개인적인 소감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느낌과 견해가 다르니까, 논쟁의 대상이 아니죠. 벽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의 대상. 이제 <현수막>과 <정책자료집>이 어떻게 나올지 매우 궁금하네요.

*

**

***

파르메니데스 단편1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단편들(Fragments)에 대한 번역(작업중). Oxford World’s Classics의 를 영어 텍스트를 원본으로 삼았다.

*F1

내 마음이 소망하는 저 끝까지

마차는 나를 태웠지

나를 데려다 저 이름 높은

여신의 길 위에 세울 때까지

여신께서는 모든 곳으로 나를 이끄시어

온전한 지식을 알려주었지

나는 달렸네

저 빠른 말들은 마차와 팽팽해져

나를 태워 달리니

천사들이 나를 안내했네

마차 바퀴 차축이 새된 피리같이

소리 내며 점점 날카롭게

양쪽 바퀴가 돌고 도니까

세차게 앞을 재촉하니까

그리도 빨리 태양의 딸 천사들이

마차를 운전하니

밤의 거처를 떠나

빛의 입구에 이르렀지

천사들은 손을 내어 머리에서

베일을 벗어젖혔지

밤의 길이요 낮의 길이요

그 앞에 서 있는 문들이요

위아래로 석조가 둥글게

그 문을 감싸는 것이요

문은 창공에 나 있어

창공이 문틀을 가득 채우고

복수의 표정을 하는 정의의 신이

이 문의 잠금과 저 문의 잠금을 지배하니

천사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달콤한 말을 정의의 여신에게 내어

능숙하게 설득해서 그녀로 하여금

재빠르게 빗장을 풀어

천사들을 위해 문을 열어젖히게끔

하니 그 문들이 활짝 열리네

문틀이 하품하듯 큰 틈을 만드네

먼저 이 문, 그리고 다음 문

청동 피벗이 돌면서

못과 리벳이 나와 문을 고정하면

천사들이 마차를 다시 몰며

말들이 문을 지나서야

그 길에 이르렀지

여신께서는 나를 환대해주시며

내 오른 손을 잡아주시며

목소리를 내시어 이렇게 설교하셨지

젊은 인간이여,

불멸의 마부들이 쉬는 곳

나의 거처에 너는 이르렀노라

저 말들이 너를 데려다 주었으니

너를 환영하노라

어떤 불길한 운명도 없었구나

지체 없이 이 길을 달려 왔으니

필멸의 인간 세계에서는 참으로 먼 길

그들의 아픈 길을 초월한 길

그것은 올바름과 정의였노라

너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균형을 지닌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마음을

필멸에 대한 확신 속에는

어떤 진실한 믿음도 없음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볼 것이다

믿음이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훌륭한 형태 속에서

모든 것이 함께 할 때의 넘쳐나는 충만함을

*

My carriage was drawn by the mares which carry me to the limits

Of my heart’s desire; they took me and set me on the renowned way

Of the deity, which takes a man of knowledge unharmed through all.

There I rode, for there the much-prompted mares were carrying me,

Straining at the carriage, and maidens were guiding my way.

The axle in its naves screeched like a pipe and glowed red-hot,

For the two wheels on either side were whirling and urging it on,

Thanks to the haste with which the maiden daughters of the Sun

Drove the carriage, having left the abode of night and entered the light.

They pushed the veils off their heads with their hands.

There stand the gates of the paths of night and days,

And a lintel and threshold of stone enclose them round about.

The gates are of aither and they fill the huge frame of the gate,

And vengeful Justice controls the alternating locks.

The maidens spoke soft and beguiling words to Lady Justice,

And cunningly persuaded her to take the pin quickly out of the lock

And pull it away from the gates for them; the gates opened wide,

Creating a yawning gap through the frame, as one and then the other

Turned in their sockets the bronze pivots which were fastened to them

With nails and rivets. Then the maidens steered the carriage

And the horses straight through the gate and down the road.

The goddess received me kindly. Taking in her hand may right hand

She spoke and addressed me with these words: “Young man,

You have reached my abode as the companion of immortal charioteers

*

*

F2

내가 시작된 곳은

경계 없는 한 곳

그곳으로 다시 나는

돌아갈 테니까

*

The point from which I start

Is common; for there shall I return again

*

*

F3

오라, 네게 말하겠노라,

– 너는 네 일부를 위해 내 이야기를 들으라

그리고 지나가라,

– 홀로 사유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길이 있나니.

존재하는 길과 존재되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있노라:

이는 믿음의 길이요 진리가 그 길에 동행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길과 존재되지 말아야 하는 길이 있노라:

이는 네게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잘못된 길이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네가 모를 것이며

– 그 끝이 없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네가 말하지 못할 터이며.

*

Come then, I will tell you ― and do you for your part listen to my tale

And pass it on ― of those ways of seeking which alone can be thought of.

There is the way that it is and it cannot not be:

This is the path of Trust, for Truth attends it.

Then there is the way that it is not and that it must not be:

This, as I show you, is an altogether misguided route.

For you may not know what-is-not ― there is no end to it ―

Nor may you tell of it.

*

*

F4

사고되는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은 사고되며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

*

For the same thing both can be thought and can be

*

*

F6

부재한 것을 지켜보아라

사고를 통해 흔들림 없이 현존하노라

존재함으로 한 몸이 된 것에서

존재를 잘라낼 수 없을 테니

내 세계 모든 곳으로 흩어지겠느냐

흩어진 것이 다시 모이겠느냐

*

By thinking gaze unshaken on things which, though absent, are present,

For thinking will not sever what-is from clinging to what-is,

Whether it is scattered at random everywhere throughout my composition,

Or whether it comes together

*

*

F7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는

결코 해낼 수 없을 터이니

구하지 말라 그런 생각을 금하라

너는 중독되지 말라

그 길에서 시련은 충분하나니

목적 없는 눈이며 소음 가득한 귀며

그리고 혀

내가 선언한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이 시험에

너는 이성으로 판단하라

*

For never shall this be overcome, so that things-that-are-not are;

You should restrain your thinking from this way of seeking.

And do not let habit compel you, along this well-tried path,

To wield the aimless eye and noise-filled ear and tongue,

But use reason to come to a decision on the contentious test I have announced.

*

*

F10

어떻게 지구와 태양과 달이

어떻게 만물을 바라보는 저 창공이

어떻게 은하수가, 저 먼 곳의 하늘이

그리고 저 별들의 뜨거운 힘이, 그 요동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

How earth and sun and moon,

How the aither, shared by all, the Milky Way, the outermost heaven,

And the hot force of the stars, all strove to come into existence.

*

*

F11

이제 빛과 어둠이 모든 호명을 받았으므로

그 힘에 따라 이것으로 저것으로 나타나나니

모든 것은 빛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둘은 같고

둘은 없음을 포함하지 아니하므로

*

Now, since light and night have been given all names

And been predicated of this and that in accordance with their powers,

Everything is full of light and dark night at once,

And of both equally, since neither of them contains what-is-not.

*

*

F14

여신께서 이 세상에 내신 모든 신 중에서

그 첫 번째 신이 바로 사랑이었노라

*

The very first of all the gods she devised was Love.

*

*

F15

저 외계의 빛이 지구를 유랑하는구나

밤에 빛나는 저 빛

*

An alien light wandering around the earth, shining in the night.

*

*

F16

빛의 줄기를 항상 보라

*

With gaze always fixed on the rays of the sun

*

**

***

모국어

모국어

*

수카니라아가 크게 울었는데 암카나리아가 있었습니다. 암카니리아가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카나리아는 체념, 평화, 침묵, 제스처, 웃음, 저녁, 단단한 돌을 모아서 꽃을 붙이고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요새를 만드는 데 오 년, 오십 년, 오백 년 걸렸습니다. 카나리아는 카나리아를 잊었습니다. 깃발을 꽂고 휘장을 붙였습니다. 요새가 가장 단단해졌을 때 카나리아가 돌아왔습니다. 그 요새는 그날 무너졌습니다. 수카나리아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암카나리아가 편하게 나뭇가지 위에 앉습니다.

*

**

***

나는 왜 쓰는가

좋은 질문이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1.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그 반대는 좀처럼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나는 내 모종의 생각을 글로 붙들어 매거나 혹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생각을 캐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나 할까.

2.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연스럽게 <나는 왜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에 이르게 되는데, 아마도 <내가 보기에 무엇이 올바른가>라는 다소 무거운 이유와 <나는 무엇을 더 좋아하는가>라는 다소 가벼운 이유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야. 그런 귀찮은 이유에 휘둘리지 않고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기는 한데, 나는 그런 인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남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고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나는 누군가 내 인생을 함부로 조작하고 통제하기를 원하지 않고 가능한 한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고 싶어.

3. 세상에는 여러 집단이 있잖니. 그리고 많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잖니. 나는 함부로 어느 집단에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이 나를 침범하게 두고 싶지 않아. 근래 이르러 어느 정도 단단해지기는 했는데, 나는 하나의 공화국이며 이 세상과 나는 거의 동등하다고 생각해. 물론 이것은 참 편리한 궤변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 세상은 큰 힘을 갖고 있지만 내 힘은 보잘것없으니까. 하지만 내 정신세계는 권력, 재력, 무력, 영향력, 인맥 따위의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힘이 작용하는 구조적인 세계와는 다른 우주라고 생각해.

4. 말하자면 나는 내 정신세계에서 함부로 침범해 있으며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는 남의 생각을 추방하기 위해서 생각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럴 때마다 나는 자유를 획득해. 이것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일이며, 빼앗긴 나를 되찾는 일이고, 상처 입은 나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라는 공화국은 내가 분명해질수록 더 강해지고 활발해져.

5. 하지만 생각은 자꾸 휘발되니까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니까 그것을 잡아두기 위해서 글을 쓰게 돼. 생각은 참 가벼워서 형태가 없어. 글은 생각에 호흡을 넣어주지. 그러면 생각은 생명력을 갖게 되고 형태를 갖추며 발육을 한단 말이야. 또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면 참 신기하게도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생각도 불쑥불쑥 떠오르잖니.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겠네.

6. 나는 학자가 아니어서 특수한 연구과제를 설정해서 엄밀하고 엄격한 태도로 생각하지는 않아. 가급적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관망하다가 어느 순간 그 부유하는 것들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편이야. 그래서 다양한 사념과 정념과 잡념이 나를 이끌어가는 대로 놔두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낯선 경험과 묘한 이야기를 경청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두기도 해. 그러면서 내 안에서 생성되고 부유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밖으로 꺼내어 놓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 글을 쓰잖니. 그런데 훈련 없이 잘 안 되니까. 습관을 통해서 익히는 기술이 필요하긴 할 것 같아. 글쓰기 습관. 내 안에 있는 것을 내 바깥으로 꺼내어 놓는 작업술, 희랍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대. 포이에시스.

7. 어쨌든 그렇게 다양한 생각으로 글을 쓰다 보면 내 생각이 내 자신에게 매혹적이고 풍요로워져서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과 거의 동등해진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그러면 ‘나’라는 공화국은 이 세상과 큰 무역을 준비하게 되지. 출판을 시도해. 그렇게 해서 6권의 책을 낸 것 같고, 지금 같아서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수십 권의 책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이 이 세상에 얼마나 이로울지는 두고 볼 일이고, 적어도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는 않을까?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인생을 살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또 행하고.

*

**

***

DOWN BY THE SALLEY GARDENS

DOWN BY THE SALLEY GARDENS (1889)

버드나무 정원에서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

Down by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버드나무 정원을 따라 내 사랑과 나는 만났지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그녀는 눈처럼 흰 작은 발로 그 정원을 지났네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사랑을 느긋하게 여기라고 그녀는 말했지, 나무에서 자라는 잎처럼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그러나 난 어리고 또 어리석어서 그 말을 따르지 못했네

*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강가 어느 들판에서 내 사랑과 나는 섰네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기울인 내 어깨 위로 그녀는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인생을 느긋하게 여기라고 그녀는 말했지, 둑 위에 자라는 풀처럼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그러나 난 어리고 또 어리석어서 이제는 눈물만 흐르네

*

**

***

WHEN YOU ARE OLD

2011년에 번역했던 시. 떠난 사랑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는 시. 예이츠의 인생을 보면 누구나 아는 그런 사연이 있기는 하다.

*

WHEN YOU ARE OLD(1893)

그대 늙거든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잠이 많아질 때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화로 옆에 앉아 잠이 올 때 이 책을 꺼내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천천히 읽으며 그 부드러운 표정을 떠올리세요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한때 그대의 눈이 그랬죠, 그 깊은 속눈썹

*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얼마나 많은 이가 그대의 빛나는 젊음을 사랑했던가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지요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그러나 그대 안의 순례자의 혼을 사랑한 남자가 있어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늙어가는 그대 얼굴에 어린 슬픔도 사랑했지요

*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타오르는 화로 옆에 숙이고 앉아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서글프게 말하시겠죠. 사랑은 달아나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저 산 위를 거닐다 하늘 높이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수많은 별 사이로 얼굴을 감췄노라고

*

**

***

송구영신

– 2016년을 보내며

*

어떤 편지는 그곳까지 이십 년이 걸리고

어떤 진심은 느리게 전해진다.

지난 겨울은 힘겨웠고 이번 겨울은 반갑다.

그사이 세월이 있다.

젊고 건강한 나무처럼 자랐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고 나와 함께 자라는 나무가 있다.

나는 거울을 닦았다.

어제 닦지 못한 곳은 오늘 닦았다.

진심 말고는 세상에 보여줄 것이 없다.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나는 그런 것에 연약하다.

나는 다스릴 수 없다.

아예 불가능한 꿈을 꾼다.

지배 없는 작은 사회를 만들자.

거울이 또 이렇게 깨끗해졌노라며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나무에게 보여주었다.

키가 이만큼 컸고 새해가 발목까지 왔다.

*

**

***

이팝나무여, 안녕

지극히 오랜만에 쓴 시. 제목 없이 그냥 되는대로 썼다가 업로드하면서 급히 제목을 붙이다:

*

flickr-credit-bettaman

 

<이팝나무여, 안녕>

*

이팝나무여, 너는 백 년 동안 거기에 있었구나.

그사이 향기를 잊고 망설이는 나무여,

여기 슬픈 눈이 소리 없이 묻는다.

네 꽃차례는 어디에 있으며 유월의 숲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그 숲 속에 있던 남자의 사진과

그 숲에서 나와 나무로 만든 책을 주고받았다.

어디 보자, 쓸모없는 계절에도 나이테가 생긴다.

세상 모든 길이 어둠 속으로 귀가할 때

이팝나무여, “안녕”

 

– 이리하여 나는 내 우주로 돌아왔다. 이곳은 꿈과 체념이 각양각색으로 섞이면서 나와 그대의 통치를 없앤 곳.

 

*

**

***

남자를 찾는 여자에게

이 글은 2013년 6월에 여자 인생 후배인 K에게, <남자론>이라는 제목으로 쓴 이메일 내용입니다. 그녀는 올해 결혼했고 제가 그 결혼식 주례를 맡았습니다. 아마 이 글이 ‘조금’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다시 이 글을 제가 받았으므로 여기에 공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

**

***

<남자론>

지금까지 아주 많은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남자들을 만났죠. 내 주위에 좋은 여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꽤 괜찮은 남자들은 적습니다. 솔로여자와 솔로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경험을 종합해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진화가 더디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함수가 있습니다. X축은 시간이며, Y축은 성장도입니다. 남자의 시간함수와 여자의 시간함수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남자의 시간함수가 여자의 시간함수도 더 다이내믹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보이는 진화의 기울기가 여자보다 좀더 큰 것 같습니다. 10년 후, 20년 후 혹은 30년 후의 남자의 변화된 모습이 여자의 경우보다 훨씬 달라진다는 이야기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변화를 염두에 두고 연애를 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대략 젊었을 때의 남자는 그저 꽃봉오리에 불과합니다. 아직 그 꽃이 피지 않았으므로 어떤 형태의 어떤 색깔의 꽃이 필지 수 없습니다. 열매는 더더욱 알기 힘들죠. 그럼에도 여자는 아직 꽃봉오리에 불과한 남자를 선택해서 연애를 해야 합니다. 원하는 않는, 좋아하기 어려운 꽃이 펴서 여자는 당황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때때로 내 남자의 꽃이 피지 않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자의 심리는 잘 모릅니다. 나는 함부로 <여자론>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남자인 까닭에 남자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압니다. 이 글의 화자가 남자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꽤 큰 기울기를 가지며 성장했으며 또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참고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경험과 직관을 이용해서 <남자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합니다. 육체적인 전성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자는 사람 나이 50세를 두고 “지천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공자는 아마도 남자를 염두에 뒀을 것입니다. “지천명”은 하늘의 이치를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이 점 지어 둔 자기 인생의 그릇이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비로소 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는 곧 자기를 알게 되는 나이를 의미합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50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젊었을 때에는 화려했으나 초라하거나 가엽게 늙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 반대로 젊었을 때에는 보잘것없었으나 늙어서 창대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일까요? 남자의 인생은 여러 번 요동칩니다. 남자론의 대전제는 50대 이후에 인생의 전성기가 찾아올 거라는 점입니다. 얼굴에 핀 주름의 멋이 남자의 전성기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남자의 시간함수와 인생의 전성기를 생각하면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자 또한 자기의 현재 모습을 좀더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요.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깊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지금 당장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앉아서 따져보고 대변과 차변을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두근거림이요 혼돈이요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미 사랑에 휩싸인 여자를 앞에 앉혀 두고서 차분히 남자론을 들이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랑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은 여자와 심심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여기 사랑할 남자를 찾고, 선택하고 연애를 하는 여자를 위해서 몇 가지 정보를 남깁니다. 냉정하고 심심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를 위해서도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남자의 무엇을 관찰할 것인지, 여자가 남자의 어떤 점들을 관찰할지에 대한 정보입니다. 재산, 직업, 외모, 꿈, 목표, 가치관 같은 것들은 시간에 따라 너무 가변적입니다. 그런 가변적인 것들에 여자는 쉽게 매혹되곤 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 매혹된 눈을 가진 여자들의 눈물을 우리는 압니다.

남자에 대한 10가지 관찰항목을 이제 말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필연적이기도 하고 우연적이기도 합니다. 나 혼자의 능력에 의해서 인생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으며, 수많은 기회가 우연을 몰고 옵니다. 기회가 한 남자의 인생의 문지방 위로 넘나듭니다. 좋은 우연을 많이 부르는 인생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필연적입니다. 어떤 남자에게는 기회가 많이 찾아오는 반면에, 어떤 남자에게는 기회가 메마릅니다. 성공과 실패는 우연적이지만 때때로 오랜 시간 축적된 필연성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열거하는 항목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얼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다섯 가지 관찰 항목을 열거합니다.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항목입니다. 그 남자는:

(1) 전화 목소리가 괜찮나요?

(2) 어른에게 예를 갖추나요?

(3) 자기 자신을 사랑하나요?

(4) 병과 정에게 친절한가요?

(5) 현재 일을 즐기나요?

*

(1) 전화 목소리가 괜찮나요? (신뢰와 기회)

(1)번 관찰항목은 “신뢰”와 “기회”에 관한 것입니다. 전화 받는 목소리는 타인에게 신뢰를 줍니다. 친애하는 상대방에 대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평상시의 목소리에 대한 것입니다. 전화 받는 목소리가 좋으면 틀림 없이 실제 만났을 때에도 퍽 괜찮을 것입니다. 사회 활동을 하는 남자에게 신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회”입니다. 신뢰는 기회를 부릅니다. 전화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전화 목소리가 나쁜 사람보다는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 남자의 전화 목소리를 경청하십시오. 공격적인 목소리, 무관심하고 매정한 목소리, 귀찮은 듯한 목소리가 반복된다면 당신은 머뭇거려도 좋습니다.

(2) 어른에게 예를 갖추나요? (상식에 대한 태도)

(2)번 관찰항목의 키워드는 “상식”입니다. 어른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남자가 “상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상식을 항상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상식에 반대되는 주장과 신념을 가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태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마음속으로 존경하지 않더라도 예의를 표하면 그 남자도 타인의 예를 받을 것입니다.

(3) 자기 자신을 사랑하나요? (발전 가능성)

(3)번은 “발전 가능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지 여부는 남자의 발전 가능성을 나타내는 리트머스입니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자기 발전의 밑거름이자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자기애와 자존감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보다는 사랑하고 믿어주는 동력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갖는 태도가 너무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당신에게는 다른 관찰 항목, 예컨대 (4)번이 있으므로 괜찮습니다.

(4) 병과 정에게 친절한가요? (천성)

(4)번은 “천성”입니다. 갑을병정 관계에서 갑에게 친절하다거나 을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그런 친절함은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친절함은 가공되고 계산되며 인위적인 따뜻함이거나 냉정함입니다. 그 남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병과 정에게 친절하게 대하는지를 살펴본다면 그 남자의 천성을 볼 수 있습니다. 종종 여자들은 냉정하고 차가운 남자, 나쁜 남자에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끌림의 대가는 그 여자의 몫입니다. 여자의 인생을 위해서 천성이 따뜻한 남자를 권합니다. 천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 성품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십 년 성장의 흔적입니다.

(5) 현재 일을 즐기나요? (열정)

(5)번의 키워드는 “열정”입니다. 현재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남자가 좋습니다. 그것은 곧 책임감입니다. 반드시 경제적인 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경제적이지만 의미 있는 일도 많습니다. 현재 그 남자가 아침부터 오후까지 줄곧 임하고 집중되어 있는 무엇입니다. 현재만이 미래를 낳습니다. 모든 열정은 현재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를 부정하고 미래를 탐하기만 하는 자세는 열정이 아닙니다. 공상일 뿐입니다. 물론 그 남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지금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젊은 나이의 남자는 그걸 잘 모릅니다. 남자의 사고, 취향, 목표의식, 꿈 같은 것은 변화하고 진화하기 때문에 현재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자주 변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일을 하고 있으며, 열심히 – 마치 즐기듯이 –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문득 혹은 서서히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 도중에 관계가 바뀌거나 환경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실함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변화된 관계와 변환된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실함과 열정은 당신에게도 전염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부정적이고 몽상적인 태도 또한 아주 강한 전염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노동의 신성함에서 벗어나 있는 남자는 당신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위와 같은 다섯 가지 항목은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항목에서 좋게 평가된 남자라면 연애해 볼만 합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할 연애인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를 이제 말하겠습니다.

앞의 항목보다는 좀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때때로 실제 연애를 해야만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 관찰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남자는:

(6) 미추(美醜)에 민감하나요?

(7) 부모한테서 독립했나요?

(8) 사생활을 중시하고 존중하나요?

(9) 술버릇을 참아줄만 하나요?

(10) 쪽팔림을 아나요?

*

(6) 미추(美醜)에 민감하나요?

(6)번 관찰항목의 키워드는 “변화”와 “관심”입니다. 남자는 진화해야 하며 더 성장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의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태도는 진화와 변화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별하려는 태도, 예쁨과 예쁘지 않음을 구별하려는 남자의 태도는 아주 유용한 정보입니다. 미추에 대한 민감함은 대개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작은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미추에 대한 쾌감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게다가 그 영역은 계속 확장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수용하는 게 “큰 것”을 수용하는 것보다 쉽고 빠르며, 작은 것이 누적되어 남자는 크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미추에 민감하면 상대적으로 완고함이 적어집니다. 변화를 보다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미추에 둔하면 어떤 사물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깊은 애정이나 관심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미추는 미묘한 차이에 민감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주 커다란 것에서 유래되는 행복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대개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인간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더 자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추에 민감한 남자는 당신의 예쁨을 여러 각도로 인식하고 인정하거나 조언을 해줄 것입니다.

모든 남자가 미추에 민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민감성이 전혀 계발되지 않은 남자도 많습니다. 그 경우에 여자가 그 민감성을 건드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서, 예쁨과 예쁘지 않음에 대해서 많이 대화를 하세요. 패션도 좋고, 디자인도 좋습니다. 그런 시각적인 것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문학도 좋고 미술도 좋습니다. 물론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괜찮겠지요. 단,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발육하게 됩니다.

(7) 부모한테서 독립했나요?

(7)번 항목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연애하고 있는 남자가 아직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마마보이와는 결혼하지 마십시오. 여자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심은 정신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혈육”과 “가족”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며, 자기 아내를 지켜줄 수 있는 심리상태인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대개의 정신적인 독립성은 경제성에 의존하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도 부모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의 경제적 자립은 매우 중요한 항목입니다. 아직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했고, 부모의 경제성에 종속되어 있는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의 인생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음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남자는 결혼 전까지는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결혼 후에 느닷없이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여자는 종종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부모와 결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마보이 혹은 지나치게 부모의 간섭에 저항하지 못하는 남자와 헤어졌다면 신의 배려입니다.

(8) 사생활을 중시하고 존중하나요?

(8)번 관찰항목의 키워드야말로 “배려”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여자의 생각과 인간관계가 남자에 종속돼야 하는 것은 옛날 이야기가 됐습니다. 당신은 옛날 남자를 찾는 게 아니라 현대의 남자를 찾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거나 참견하거나 대화의 화제로 삼는 남자를 피하십시오. 그런 남자와 함께 살면, 설화를 당하거나 이상한 일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적절하게 경계를 유지하며 자기 사생활을 중시하고 또 남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남자라면 당신 인생도 배려해 줄 것입니다.

(9) 술버릇을 참아줄 만하나요?

(9) 술 버릇이 안 좋은 남자를 멀리하십시오.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람과는 교류를 끊으십시오. 술 마시고 일탈하는 남자를 조심하십시오. 술을 마셨으니까 봐줘야지가 아니라 술을 마시고 “나쁜 행동”을 했으므로 더 가중하여 멀리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나쁜 남자도 괜찮다면, 윤창중과 같은 남자를 원한다면, 이 항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10) 쪽팔림을 아나요?

(10) 염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잔인한 남자는 무섭습니다. 염치를 알고 쪽팔림을 알면 잔인해지지 않습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아빠가 됩니다. 아이는 염치를 모르는 아빠를 보고 자라므로 아빠로서도 좋지 않은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쪽팔림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멀리 하십시오. 부끄러움을 알면 일탈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모르면 일탈하고, 폭주하며 잔인해집니다.

*

**

***

내각제를 선호하는 이유

나는 내각제 개헌을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관료/정치인/재벌 등 힘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책임의식이 부족한 이 상류 문화에서 한 사람에게 강력한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구조가 사회 발전의 큰 저해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합니다.

둘째 국민의 통제가 아닌 최고 권력의 통제가 관료 체제를 지배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통령제 하에서 국정감사가 형해화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국가 행정의 상당수의 역량은 국회 국정감사를 대비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투자되는 역량에 비해서 최고 권력의 통제권한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국가 행정기관의 책임성과 자율성은 현저히 적고, 청와대 눈치만 봅니다. 그렇다면 국회의 권한을 축소하든가 아니면 행정기관의 책임성을 강화하든가 두 개의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 경우 저는 후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역시 내각제입니다.

셋째 논쟁과 설득이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 하에서 여당 또한 레임덕이나 탄핵심판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실상 청와대 권력 하에 통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에서 강력한 여당은 허수아비가 되고 그러므로 야당과의 논쟁과 설득은 공론만을 양산하며 그것이 정치 불신이나 혐오의 씨앗이 됩니다. 대의기관에게 권한과 책임이 있어야 제대로 논쟁과 설득이 만들어지고 그래야만 제대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넷째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의 권한이 강조됨으로써 소수 정당의 힘도 더욱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 시스템에서는 소수 정당은 항상 권력 바깥에 있을 뿐이며 집권할 수도 행정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각제 하에서는 한두 의석 사이로 정권의 향방이 결정되기도 하며 연정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어서 소수 정당이 오히려 이니셔티브를 주면서 국가행정에 참여할 기회가 생깁니다.

다섯째, 내각제에서는 권력의 권한과 국민의 지지가 서로 연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에게 매우 강력한 권력이 부여됨에 비해서 국민의 의사와 의지에 의해서 그 권한을 통제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탄핵심판 절차라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통령의 무책임과 무능과 일탈을 견제할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반면 내각제에서는 국회해산과 총선을 통해서 다시 민의를 수렴할 수 있습니다. 국회해산과 총선을 두고 혼란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의의 수렴은 혼란이 아닙니다. 권력과 국민 사이에 지나치게 위험할 정도로 틈이 벌어졌다면 그것을 다시 국민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에 있고 그 선거를 혼란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내각제를 채택하고 일본 정치를 보라고 말합니다. 전후 일본 정치가 한국 정치보다 무엇이 나빴는지 의문입니다. 쿠데타, 군부독재, 민주주의 탄압, 대통령의 나몰라라 미용 시술은 일본 정치에서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자민당 장기 집권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일본 국민의 민의입니다. 내각제는 일본만 채택하고 있는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영국과 독일을 비롯해서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내각제에서는 위험한 선동가나 무능한 인물이 강력한 권력을 쥐기 어렵습니다. 국민은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시스템이 내각제 하에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나는 내각제 개헌을 지지합니다.

*

**

***

I dreamed a dream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판틴의 노래. 영어 원문가사에 대한 한국어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번역하였습니다.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되, 한국어 가사로도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영시가 자연스럽다면, 번역된 한국어 시도 자연스러워야 함은 물론이고요. 시답게 라임은 맞추었고 리듬도 생각하면서 번역, 더 좋은 번역이 되려면 노래에 맞아야 하는데.. 그것은 생략합니다. 대략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I dreamed a dream 나는 꿈이 있었죠

 

There was a time when men were kind 남자들이 상냥한 시절이 있었죠

When their voices were soft 그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And their words inviting 내 마음을 이끌었지요

There was a time when love was blind 사랑에 눈먼 시절이 있었죠

And the world was a song 세상은 노래였고

And the song was exciting 노래는 내 마음을 설레게 했어요

There was a time 그런 시절이 있었죠

Then it all went wrong 그런데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말았네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지난날 나는 꿈이 있었죠

When hope was high 그때 희망은 넘쳤고

And life worth living 인생은 참 살만했어요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사랑은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꿈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신은 자비로우실 거라는 꿈

 

Then I was young and unafraid 그때 나는 젊고 겁이 없었죠

And dreams were made and used and wasted 꿈을 만들고 쓰고 낭비하고

There was no ransom to be paid 속죄할 대가는 없었어요

No song unsung, no wine untasted 부르지 않은 노래, 마시지 않은 술이 없었네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그러나 굶주린 짐승들이 들이닥쳐요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끈적한 목소리가 밤 벼락처럼 덮쳐요

As they tear your hope apart 그들은 당신의 희망을 갈갈이 찢어버려요

As they turn your dream to shame 당신의 꿈을 수치심으로 바꾼다고요

 

He slept a summer by my side 그는 내 곁에서 한여름을 보냈죠

He filled my days with endless wonder 끝없는 경이로움으로 나를 채웠죠

He took my childhood in his stride 그이는 내 순정을 앗아갔어요.

But he was gone when autumn came 가을이 오자 그는 떠났네

 

And still I dream he’ll come to me 나는 아직 그가 돌아올 거라는 꿈을 꿔요

That we will live the years together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꿈을

But there are dreams that cannot be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있지요

And there are storms we cannot weather 헤쳐나갈 수 없는 폭풍도 있어요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그 꿈에서 내 인생은요

So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지금 같은 지옥과는 아주 다른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지금 내 처지와는 아주 다른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 하지만 인생이 내 꿈을 죽여버렸네, 내가 꾼 꿈을.

*

**

***

 

 

On my own

레 미제라블의 <on my own>을 번역해 본다. 한국 초연할 때 번역된 노랫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뮤지컬 레 미제라블 가사 번역 전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에포닌의 절절한 마음이 한국어 노래에서는 잘 전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번역. 일상언어이면서 동시에 라임과 리듬을 맞추면서 곡에 맞게 번역했다.

*

On my own 나 홀로

Pretending he’s beside me 그이가 곁에 있는 것처럼

All alone 혼자서

I walk with him till morning 함께 맞이하는 아침

Without him 그이 없어도

I feel his arms around me 그의 두 팔이 감싸 와

And when I lose my way I close my eyes 길을 잃으면 나는 두 눈을 감지

And he has found me 그럼 그이가 나를 찾지

 

In the rain the pavement shines like silver 비가 와, 은빛으로 반짝이는 도로

All the lights are misty in the river 강물은 가로등으로 빛나고

In the darkness, the trees are full of starlight 어두워도 나무는 별빛 가득히

And all I see is him and me forever and forever 이 세상은 그이와 나 영원히 영원히

 

And I know it’s only in my mind 알아요. 혼자만의 상상이란 걸

That I’m talking to myself and not to him 그 없는 나만의, 나한테하는 혼잣말

And although I know that he is blind 그이는 아무것도 몰라줘요

Still I say, there’s a way for us 그래도 우리를 위한 길은 없을까요

 

I love him 사랑해

But when the night is over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He is gone 그는 가

The river’s just a river 강은 그저 강이야

Without him 그이 없으면

The world around me changes 빛나는 세상은 모두 변하고

The trees are bare and everywhere 나무는 헐벚고 모두 마르고

The streets are full of strangers 거리는 온통 낯선 사람들로만

 

I love him 사랑해

But every day I’m learning 하지만 난 매일 깨달아

All my life 내 인생

I’ve only been pretending 난 짝사랑으로 살았네

Without me 나 없어도

His world will go on turning 그이는 잘 살아가겠죠

A world that’s full of happiness 그 세상 그 가득한 행복

That I have never known 그건 내가 모르는 행복

 

I love him 사랑해

I love him 사랑해

I love him 그이를 사랑해

But only on my own 하지만 나 홀로

*

**

***

 

 

Blowin’ in the wind

딸을 위한 <Blowin’ in the wind>

지난 주부터 틈만 나면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니까 아이들도 그냥 흥얼거린다. 오늘 딸이 샤워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샤워 끝나자마자 아빠한테 가르쳐달라고 한다. 나는 아직 딸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따님용 버전은 메타포를 없애고 그냥 내멋대로 가르쳐주기로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남자가 남자가 되려면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 아니?

평화롭게 쉬기 전에

여자가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아니?

영원히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포탄으로 죽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옛날 옛적에 산이 깎여서 바다가 됐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옛날 옛적에는 자유가 없었대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로 죽었을까?

나쁜 짓을 봤는데도 고개를 돌리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어째서 노예들은 하늘을 보지 못할까?

하늘이 저렇게 예쁜데

어째서 사람들은 귀를 막고 살까?

이쪽 저쪽 울고 있는데

언제까지 사람들은 모른 척 할까?

저러다가 연약한 사람들 다 죽겠네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Blowin’ in the wind> 바람에 날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Before you call him a man ?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저 흰 새는 얼마나 많이 날아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 모래밭에서 쉴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 영원히 멈추게 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Before it’s washed to the sea ? 산이 바다로 떠내려갈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돌리며

Pretending he just doesn’t see ? 또 외면하는 것일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들어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나서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 그는 그 죽음을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