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e에 대하여

미래의 딸에게:

(언젠가 인간과 역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나이가 될 때)

오늘 아침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네가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씻고 혼자 아침 밥을 먹고 스스로 옷과 가방을 모두 챙긴 다음에 혼자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단다. 학교에서 장기자랑 같은 게 있어서 일찍 가서 준비해야 한다며 말이지. Your my sunshine을 불렀을 게다. 너와 초상화(민주)는 노래를 불렀고, 김미국(여령)은 피아노를 쳤으며, 수예는 우쿨렐레를 연주했을 거야. 기억이 나니? 아빠는 가방과 첼로를 메고 너 혼자 등교하는 것이 걱정돼서 눈 부비며 잠옷 차림으로 자동차 키를 돌렸단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십 분 정도 일찍 등교했다. 피곤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제 KBS홀에서 <베토벤을 만나다>라는 공연을 관람해서 평소보다 많이 늦게 잤거든. 오늘 있었던 일은 이렇게 대충 기록해 두고, 이제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 이 이야기는 아빠가 요 몇 년 동안 깨달은 것인데,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쓸모있는 이야기란다. 이 글을 읽을 즈음에는 이미 너도 제법 많은 언어를 알게 돼서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또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겠지. 중학생이 되었을지 고등학생일지 모르겠구나.

오늘 아빠가 말하고 싶은 단어는 딱 한 개란다. Nature라는 영어 단어야. 엄청 쉬운 단어지. 그런데 이 단어에 우리 인류의 정신세계사의 핵심이 들어 있단다. 이 단어는 이미 너도 잘 알거야. <자연>이라는 단어를 먼저 생각하겠지. 그래 <자연>이란다. 또 무슨 뜻이 떠오르니? <본성>이라는 낱말을 떠올릴 수 있다면 네가 그럭저럭 영어 공부를 한 것이다. 영어 사전을 한 번 찾아보거라. 그밖에도 여러 낱말들이 있다. 이것들을 아빠가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고, 그럴 능력도 안 되니까. 딱 이 두 개의 뜻, <자연>과 <본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우주 만물을 지칭하는 자연을 영어로 Nature라고 말하고,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Nature라고 말한단다. 인간은 자연과 분명히 다른데도 인간에 대해서도 Nature가 되는 것이지. 우리 한국어로는 <자연>이라는 낱말과 <본성>이라는 단어가 명확히 구별되어 있음에도, 영어로는 그냥 한 단어 <Nature>가 된단다. 왜 그런지를 네가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옛날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자연과 인간을 그다지 구별하지 않았단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것이고, 인간의 뿌리를 우주 삼라만상의 자연에서 찾았지. 이런 생각은 동양과 서양에서 큰 차이가 없었어. 서양사람과 동양사람의 DNA가 다르지 않을 테고, 인류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하게 진행됐거든.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자연과 인간은 그다지 크게 분리되지는 않았지. 인간을 특별하게 생각하기는 했어도 자연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지는 않았어.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연을 닮아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자연을 닮으면 좋은 것이고, 자연을 닮지 않고 인간 스스로 유별나게 톡톡 튀는 모습은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더라.

서양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한다. 그리스 철학자 중에는 탈레스, 아낙사고라스, 아낙사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피타고라스 등등의 철학자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들 철학자들은 자연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가장 중요한 지혜로 삼았어. 그 후 철학자 중의 철학자인 플라톤이 등장하는데, 플라톤 철학을 다소 간단하면서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연의 본래의 모습>을 가장 높은 아름다움/올바름/좋음으로 봐서 인간이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어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이었단다. 우리 인간이 자연을 잘못 이해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 같더라. 인간의 <본성>은 <자연>이 선물한 것인데, 그 진짜 본성에서 벗어나서 자연 그 자체로 분리되기 때문에 인간사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고대의 철학자들은 생각하더군.

플라톤의 자연 그 자체가 바로 <이데아>가 될 터인데, 몇 백 년이 지난 다음에 이 Nature, 그러니까 이데아, 즉 자연 그 자체가 더욱 강력하고 신성한 존재로 바뀐단다. 자연 중의 자연, 모든 자연 의 근원이 되는 자연, 곧 신God의 등장이었지. 기독교 사회가 되었어. 대략 플라톤 시대로부터 700년 정도 걸린 것 같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를 <예수>로 바꾸면, 대체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가 되지. 기독교의 교리가 플라톤 철학을 대체하는 성공했고, 그 시대를 “중세”라고 부른다. 이것은 너도 알 것이며, 그 이전을 “고대”라고 부르고.

중세는 자연 중의 자연, 모든 자연의 근원이 되는 자연, 절대자의 섭리가 온통 지배하는 시대였다. “섭리”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렇단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 법칙은 언제 어디에서든 항상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를 뜻한다고 보면, <자연>이라는 단어는 <필연성>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가 된단다. 좀 어려워졌구나. 좀 쉽게 설명하자면, 누군가 노예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자연 중의 자연(절대자)이 그렇게 만든 것이고, 왕으로 태어났다면 역시 위대한 자연이 그렇게 선물한 것이라는 이야기란다. 노예의 본성과 왕의 본성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결정했다는 점이지. 인간은 함부로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는 이런 자연의 결정 앞에서 함부로 대들 수도 없었지. 왕은 왕이고 노예는 노예였어. 누군가 왕따를 당하면 왕따를 당하도록 자연이 정한 것이므로 어떻게 제대로 저항할 수 있었겠니. 이런 시대가 자그만치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단다. 그래서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종교는 신을 칭송하고 찬양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사람의 죽음조차 자연이 정한 본성에 따라 죽는 것이지. Nature(자연)은 Nature(본성)이란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딸아, 서양과 동양을 함부로 구별하지 말거라. 지구촌에 사는 인류는 그다지 차이가 크지 않아요. 앞에서 설명한 역사는 서양만 그랬던 것은 아니란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동양에서도 자연과 사람을 그다지 분리하지 않는 경향은 어디에서나 있었지. 천륜을 지키는 것이 인륜이었으며, 하늘의 도는 인간의 도여야 했단다. 동양사람들도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기를 노래했으며, 자연은 언제나 신의 모습으로 비쳐졌단다.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모두, 자연의 섭리를 절대적으로 따랐고, 자연스럽게 운명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처럼 생각했단다. 그래서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노예는 노예며, 왕은 왕이었단다. 이것은 동서양에 차이가 없었지. 중동지역에서는 지금까지 1500년간 이슬람교가 지배해 왔다. 이슬람교도 그 뿌리가 기독교와 맞닿는 부분이 있는데, 모든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자를 숭배해야 하며, 절대자 이름으로 교육되는 교리를 인간이 함부로 대들 수 없었지. 말씀이 곧 자연이었으며, 자연이 곧 말씀이었으므로, 지구 전체가 자연이 지배하고, 자연을 인간의 본성으로 삼게 되었단다.

그런데 아주 기묘한 일이 서양에서 발생했지. 자연에 맞서려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 출현했단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힘이 있고, 그 생각하는 힘은 왕과 노예의 차이가 없으며, 누구나 공평하게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생각하는 힘은 자유로운 상태여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가 필수적이지 않겠냐는 것이지. 운명은 하늘의 결정이므로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고 아주 오랫동안 당연히 생각해 왔는데, 인간 스스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 거야. 그러려면 역시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했지. 자유가 있어야만 생각하니까. 노예는 생각을 못해. 생각할 여유/지식/경험이 없거나, 생각을 하면 더 괴롭거나. 어째서 괴롭겠니? 자유롭게 생각하면 의지가 생기는데, 노예에게는 순종하는 거 말고 의지가 허락되지는 않으니까. 다시 다르게 말해 보면, 자유가 있어야만 더 나은 운명을 만들고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길 테니까. 자유가 없으면 의지도 없고, 의지가 없다면 자유은 자연에 승복하지 않겠니.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창조한 절대자가 그런 자유의지를 선물한 것이라고 확신했단다.

지금이야 이런 생각이 당연하잖니? 인간의 자유는 오늘날 상식이 됐고, 헌법의 권리가 되었으며, 인권이며, 누구나 자유의지를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지. 하지만 유럽에서 몇 백 년 전에는 이런 상식적인 생각이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사상이었어. 그런 생각의 거대한 흐름을 계몽주의라고 부른단다. 아빠가 좋아하는 칸트 할아버지는 계몽주의를 완성한 사람이라고 아빠는 메모하고 있지. 어쨌든 계몽주의가 없었다면 현대의 인류는 없었다. 계몽주의는 인류에 빛을 선물했는데, 그 빛은 우리 인간이 <자연>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벗어날 수 있음을, 자연이 정한 운명이라는, 신이 결정한 본성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인간 스스로, 인간 한 명 한 명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빛이었어. 요즘 들어서 뭘 좀 아는 척하는 사람들 중에는 함부로 계몽주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다시 말하지만 계몽주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인류의 번영은 가능하지 않았을 거야. 계몽주의는 자연이 정한 운명들, 신분이나 계급 같은 것의 권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칭송하고,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자극하고 보장해줬단다. 바로 그것이 서양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분이 되었을 거야.

인간이 자기 본성, 즉 운명에 저항하는 역사는 쉽지만은 않았어. 자연이 완벽하게 인류를 지배하는 세월이 천 년이 넘었으니까 어떻게 수십 년만에 간단하게 바뀌겠니. 수백 년이 걸렸고, 그 수백 년 동안 혁명과 내전과 전쟁이 발생했단다. 수백만, 수천 만명이 죽었다. 자유를 위해서. 자연이 정한 본성에 지지 않으려고. 자연이 정한 본성이란 무엇이겠니?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힘든 것이란다.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 같은 것이란다. 우리 인류는 “자연이 정한 본성에 따라”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지. 차별은 당연했고, 심지어 함부로 사람을 죽였어. 그러나 “자연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오랜 싸움 끝에”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에 따른 차별이 곳곳에서 추방됐단다. 자유에 대한 대가로 수백, 수천 만 명이 죽어가면서 말이지. 

한국의 역사 대부분은 동양의 다른 나라처럼 자연이 완벽하게 지배한 역사이며, 개인에게 허락된 자유는 아주 적었던 것 같다. 신분을 넘어서는 개인의 자유란, 개화 이전에는 거의 없었지 않았을까? 개화 이후에 수입되었으며, 그 역사도 고작 100년에 불과하지. “개화”란 무엇인가? 역사 시간에 배웠겠지만, 아빠는 좀 다르게 생각한단다. “자연에 맞서기 시작하는 계기”로 해석하고 있지. 인종, 민족, 신분, 종교, 젠더, 지역이 정한 차별을 인식하고 맞서기 시작하는 때로 해석하는 아빠는 지금도 개화기라고도 생각해.

그런데 자유와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나올까? 서양에서 “이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그것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다. 자유와 감정은 어울리지 않지. 자유와 이성이 어울리는 것인데, 많은 한국인이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더구나.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은 한국보다 사정이 훨씬 좋았지. 더 일찍 개화했으며, 더 많은 사람이 서구의 정신세계를 받아들였어. 그러나 당시 일본의 권력자들은 서양의 정신보다는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결국 서양의 정신세계는 추방되고 그 껍데기만 채용돼서 군국주의의 길로 타락했다. 전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는데, 서양의 진정한 힘은 발달된 기술과 경제력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정신이란다. 모든 시대에서 개화란 물질이 아니라 정신임을 네가 깊이 생각해 주기를 아빠는 바라는구나.

오늘날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테러를 일삼고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있잖니. 이슬람교가 나빠서는 결코 아니지. 세속화되지 않은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자연이 지배하는 사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자연(절대자)이 정하는 섭리가 여전히 강하지만, 인간 개인개인의 자유가, 자유의지가 21세기 맞지 않게 지나치게 연약하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지. 자연이 강하면 자유가 약하고, 자유가 약하면 대다수의 인간은 폭력에 노출된단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역사이며, 동양에서도 그랬고, 서양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는 아직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더구나. 하지만 지금의 이슬람교보다 더 무서웠던 기독교가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도 언젠가는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가 자연에 맞서면서, 종교가 정한 본성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아빠는 생각해.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

아빠가 언젠가 네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연의 반댓말은 인간이 아니야. 자연의 반댓말은 “자유”란다. 어째서 인류가 곳곳에서 다양성을 옹호하며 자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으며 싸우고 있는지를 네가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네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본성이 있더라도, 혹은 네가 선택하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네게 있을 것이고, 그 힘을 이용해서 지혜롭게 맞서거라. 그 힘은 우리 인류 조상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백 만, 수천 만명이 생명을 바치면서 기어이 지켜낸 힘이지. 그것은 “너의 자유의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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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선 공약같은 거 보지 말자

지난 번에 문재인 후보의 제1 공약인 <공공부문 81만개 일자리 창출> 공약이 얼마나 헛된 공약인지, 산수 착오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설명했어.일자리 “창출”, 이것은 없던 것을 만드는 거겠지. 그것도 공공부문에서 말이야. 81만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나는 사실 이것저것 후보들의 공약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했어. 주제 파악하라고?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니? 착각도 자유셔. 그래,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 범인이 함부로 정책 평가를 하는 게 웃긴 일이긴 하지. 정책을 만드신 분들도 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만든 거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돌아다녀 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00명이 아니라 거의 삼십 만 명 수준인 것 같고, 모두가 다 정치 전문가이며, 하나 같이 정책통이지. 뭐, 권위랄 게 있니. 이 직접 민주주의의 거대한 연회장 같은 곳에서는 모두 정당인인 셈이야. 인물이 너무 많다 보니 실력이라는 것이 하찮게 돼버렸어. 그래서 나보다 못한 범인이라도 어딘가에서 의자 하나 넉넉히 차지할 수 있고 제법 목소리도 낼 수 있겠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책 팸플릿이나 읽고 끄적이는 거였는데. 그것도 이제 그만 하려고 해.

한국의 위대한 정당인들은 별로 정책에 관심이 없어. 정책은 지극히 냉정한 작업의 결과이며 가장 이성적인 성과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5000천만이라는 숫자가 장난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 수많은 정치인들은 이성보다는 감정을 선호하지.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중요하지. 정책이 무엇이든 승리만 하면 돼. 정책에는 관심이 없어. 정책을 예쁘게 치장한 인테리어는 좋아하지. 번지르르한 모델 하우스에 감탄하겠지. 하지만 화려한 장식물 안에 보이지 않는 곳의 재료와 구조를 좀처럼 걱정하지는 않아. 조화와 환경은 더더욱 관심 밖이지.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니까. 사람들이 이러하니, 정책 만드는 일도 그럴듯하게만 하면 되는 일이야. 바보야,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다 쓸모없는 일이야. 선거는 분위기야. 대중이 알아서 환호하게 뜨겁게만 만들면 돼.

그래서 요즘 나는 시끄러운 창문을 닫았어. 그냥 플라톤의 책이나 읽으면서 국가에 대한 해묵은 공부를 해. 나 같은 재미 없는 사람에게는 이게 훨씬 재미있더군.

내가 문재인 후보 공약 하나 비판했어. 그런데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 공약을 다루지 않으면 매우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어. 그렇지만 이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자괴감이 커서 몹시 귀찮아졌어.

간단하게만 말하자.

안철수 후보의 공약순위 1이 이거야. <튼튼한 자강안보를 토대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온갖 좋은 표현은 다 모아 놨어. 첨단 국방력 건설로 강력한 자강안보 구현, 한미동맹 강화와 동북아 평화체제 병행 추진, 4자회담과 6자회담 재개 추진, 평화외교-통일외교-선진통상외교 추진, 5. 평화로운 과정으로서 통일 추진. 뭔가 많이 정리했어. 그런데 참 이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 첫째 공약순위 1번인데도 신선함이 대단할 정도로 전혀 없다는 뻔뻔함, 둘째, 이렇게 구태의연한 정책을 공약순위 1번으로 올려놓는 대범함, 셋째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반도 정세가 이토록 위중해서 높은 수준의 창의성과 전략이 필요함에도 나사가 여러 개 빠진 것처럼 상호 논리 모순되는 정책을 명료한 방향 없이 나열하는 몽롱함. 어떤 교수가 관여했겠지. 어떤 높은 정치관료가 지시했는지도 모르지. 이거 하나만 봐도, 적어도 <정책과 전략>에 관해서, 안철수 후보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문재인 후보 주위에 권력을 애호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모여 들어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별로 없다는 속담을 인용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어. 무능한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면 유능한 사람의 존재가 희석화되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누가 봐도 세가 부족한 안철수 후보 캠프라면, 적어도 소수라면, 그 소수는 정예가 돼야 하지 않겠어? 정책집을 보면 참 한숨이 나와. 어쨌든, 공약 1순위에서 정책을 치장하는 수사를 지워버리고 간명하게 메시지를 정리하자면 이 정도가 될 것 같군. 친미자주. 강력한 안보, 유연한 외교, 항구적 평화.

심상정 후보. <노동이 당당한 나라>,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 <노동존중 정부로 국민의 삶을 바꾸겠습니다.> 뭔가 멋져 보이지만, 운동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나 할까. 기본적으로 운동권 출신 정당은 어디까지가 국가의 한계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해. 국가의 한계, 그 지점이 좌파의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거야. 그래야만 그들의 습관적으로 고안해내는 “소비에트적 발상”, “소비에트적 정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들은 국가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 국가가 어떻게 개인과 시장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니? 국가를 그렇게 (의도하지 않게) 빅브라더를 만들려는 관념과, 좌파 특유의 개인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을 어째서 보지 못할까? 심상정 후보의 정책은 국가의 강력한 법률의 규제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야. 폐지, 금지, 제한, 의무, 보장 등이라는 단어들은 모두 국가의 강제권한을 발동하는 것을 전제로 해. 나로서는 정의당의 빈곤한 상상력과 빈약한 현실성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 뭔가 보통사람들, 월급을 주고 월급을 받는 보통사람의 인생이 ‘이론적으로만’ 취급된다는 생각도 들어. 시장과 국가는 어떤 관계일까? 개인의 인생과 국가의 역할은 어떤 관계일까?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 올바름에 대한 견고한 태도야말로 심상정 후보 캠프의 빛나는 장점이지만, 이 장점은 더욱 빛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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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국사회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우리 어린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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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선 공약 좀 보자(1)

이제부터 몇몇 후보 대선공약을 평가해볼래. 그냥 하는 거야. 특별한 목적 없이.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책/공약이 궁금하니까. 누가 당선되든 어떻게 되겠지. “국가는 어디까지 역할을 해야 하며, 어디가 한계인지”에 관한 국가관이랄까 국정 운영의 방향에 관한 철학이랄까, 그런 게 별로 없어 보이더군. 공약이 뭐 아이디어 수첩이니. 문재인, 안철수, 문재인, 안철수, 심상전, 문재인, 안철수 식으로 따져보고 싶어. 홍준표와 유승민을 보기 싫어. 국정운영 실패에 대해 책임을 한번쯤 크게 져야 하지 않겠니. 먼저, 문재인. 기호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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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공약, 이것이 문제이다(1)

문캠프의 공약 1호는 이거야. 일자리를 책임지겠다. 어떻게 책임지지? 이렇게 하겠다는군.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개 창출>, 이거 대체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어. 그것도 공약 1호야. 젠장, 아주 기초적인 산수가 잘못됐어. 소요 예산의 오차만 42조원이야. 실패!

우리 다 같이 생각을 해 봐. 공무원이 아닌 수많은 국민들이 있어. 이런 국민들은 이런저런 아주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겪어. 시장은 냉정해서 서슬퍼런 구조조정이 있고, 많은 사람이 쓰러지며 낙오자가 생기지. 어쩔 수 없어. 많이 창업하고 많이 망하지. 그러고는 다시 뭔가를 도모하고 재기하고 아주 열심이야. 그런데 어떠니? 공무원은 그런 게 없어. 쫓겨나지만 않으면 시장에서와 같은 실패가 없지. 거기만 안전지대야.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미친듯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거겠지. 일자리 창출은 이런 시장에 관한 정책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일자리 81만개 창출이라. 모두 공무원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공공부문 비정규직? 낮은 임금? 통계적으로만 의미있는 그런 일자리?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에 대한 소요예산은 5년간 21조원이라는 거야. 도대체 누구의 산수 계산이냐. 일자리는 계속 유지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지출된 급여는 누적될 것이고, 재정지출은 더 커지겠지? 막말로 4년간 공약을 안 지켰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막판 2022년에 81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볼게. 이렇게 하면 산수도 쉬워지고 또 재정지출을 줄일 수도 있으니까. 21조원을 81만원으로 나눠봤어. 연봉 2,600만원이군. 아하, 이런 계산이었구나. 그러니까 문캠프 공약 1호은 4년간 지키지 않다가 만판에 지켰을 때, 연봉 2,600만원 일자리 81만개야.

자, 그러면 81만을 5로 나눠. 162,000이야. 이제 본격적으로 따져볼 거야. 이 공약을 설계한 사람은 2,600만원 정도의 연봉이라면 좋은일자리라는 관념이 있을 거야. 일단은 인정해 줄게. 문제는 공약설계자가 산수를 못한다는 거야.

2018년에 채용한 162,000명. 2600만을 곱해. 4.2조원이야. ㅋㅋㅋ선관위 문 캠프 공약 봐봐. 매년 4.2조원이 소요된다고 하잖아. 나, 너무 정확하게 맞힌 거 아니니.  그런데 2018년에 채용한 사람은 2019년에 모두 짤라버려? 너는 사람을 그렇게 쓰니? 모두 사표내? 직장이 그리 우습니? 2022년까지 근무한다고 봐야겠지. 그러면 임금이 5년간 전혀 오르지 않는다는 전제로 4.2조원*5가 돼. 그래서 21조원이지. 자, 162,000명이야. 81만명이 아니라.

그러면 2019년에 다시 162,000명을 채용해야 해. 그러면 다시 4.2조원, 그런데 2018년에 채용한 사람이 또 있겠지. 다시 4.2조원. 더하기 문제야. 8.4조원이 소요돼.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2020년에는 12.6조원. 계속 누적지출이 생기겠지? 이거 간단한 산수잖아. 표로 보여줄게.

  2018 2019 2020 2021 2022 합계
2018(162,000) 4.2 4.2 4.2 4.2 4.2 21
2019(162,000) 4.2 4.2 4.2 4.2 16.8
2020(162,000) 4.2 4.2 4.2 12.6
2021(162,000) 4.2 4.2 8.4
2022(162,000) 4.2 4.2
81만명 일자리 재정지출 합계 63조원

*

2022년에 모두 해고되는 것도 아니잖니? 그러면 재정지출은 계속 누적될 거야. 연봉 인상이 당연히 되겠지. 그러면 재정지출은 더 커질 거야. 사업해본 사람은 알지.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만 해도 돼. 사람을 한 명 채용하면 연봉만 들지 않아. 책상도 컴퓨터도 있어야 하고 공간도 시설도 필요하지. 세금과 연금과 복지비용까지. 뭔가 부대비용이 꽤 들어. 일은 해야 하니까. 그러면 또 예산이 커질 거야.

그러니까 문 캠프 공약 1호를 지키려면 63조원으로도 부족해. 거의 80조원은 넘지 않을까? 그런데 공약집 소요예산은 21조원이라는 거야. 공약집에서 어째서 21조원이 나온 것인지는 위에서 쉽게 추리해냈어. 이것은 너무 심한 오류잖니? 이런 공약 지켜지지 않겠지. 지키면 안 돼.

*

국가는 돈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국가는 인프라로 말해야지. 더 나은 공공 인프라를 위해서 공공부문을 강화하겠다는 것과, 일자리 창출은 직접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해.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야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니까. 공공부문을 강화하다 보면 거기에서 일자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원래부터 시장에 있던 일자리가 공공부문으로 교체된 것일 수도 있어. 그것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분류하면 안 돼. 일자리 정책은 일자리 정책이고, 공공인프라 정책은 공공인프라 정책이야. 그렇게 분별을 해야만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거라고 나는 생각해.

결론적으로 문캠프의 공약 1호는 아주 안 좋아. 이행방법이 없어. 과연 좋은 일자리인지도 의심스럽고. 다른 공약도 읽어봤는데, 뭔가 시장을 활성화할만한 정책은 보이지 않네. 문 캠프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였을텐데, 그 중에 진짜 전문가는 적다는 거겠지. 그런데  후보라면 이 정도는 생각해서 공약의 문제점을 파악했어야 하지 않을까.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돼서 성공하려면 주위 참모들이 탁월해야 할 거야. 거꾸로 참모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잘못/어설픈 정책을 제안될 때, 대통령이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설득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또한 결국 정책은 관료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 같애. 이 공약 1호를 분석하다 보니 그런 점이 염려되는군.

*

다음에는 안 캠프 공약을 한 번 거칠게 다뤄볼까 해.

*

**

***

19대선거벽보 촌평

19대 대통령선거가 시작됐다. 벽보가 나왔다. 어, 이거 재밌네. 안철수 후보 벽보가 아주 흥미롭잖아. 일단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어쩐지 우스꽝스럽고 지지자를 불안하게 만들지. 반대자는 신났다고 조롱하고 말이야. 난, 이거 그냥 재밌어. 상식과 관습에 어긋나는 표현이, 이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는 거라면, 재미로라도 분석해 볼 만하지.

대통령선거 벽보. 일반인의 상식은 이런 거야. 이미지 아래에 기호와 벽보가 들어가지. 통상 후보의 소송 정당 이름도 들어가. 세로 쓰기를 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우측에 새로로 이름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패쓰.

개그맨

*

그런데 어제 공개되었던 19대 대통령선거 벽보는 이랬어. 일단 주요정당의 후보 5명만 보자고. 탁 봐도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의 포스터가 다르네. 어, 이거 모냐. 장난하냐?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서 장난 아닌 반응이야. 물론 대개는 비난과 조롱이었지. 지지자들은 불안해 하더군. 이게 모냐고. 아마추어처럼 말이야.

19대대통령선거 포스터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이거 완전 성공이잖아. 상단에 기호와 이름이 들어가니까 아주 간단하게 차이를 표현했어. 다섯 명의 후보가 가로로 나란히 붙게 된다면 이득을 보겠지. 나란히가 아니라 타일식으로 벽보가 붙게 된다면 특별해 보이지는 않겠군. 하지만 대체로 가로로 나란히 벽보가 붙게 되고, 그러면 아주 눈에 띄게 될 거야. 후보가 15명? 유권자는 이 다섯 후보를 볼 때와 나머지 10명의 후보를 볼 때의 마음 상태가 달라. 좀 자세히 보자.

안철수

‘안철수’에서 ‘수’가 끝에서 좀 짤렸어. 숫자 ‘3’도 그렇고. 이런 여백없는 레이아웃과 배치는 편집 디자이너들이 좋아하는 관능적인 표현이지. 후보의 이름도 조금 잘라버릴 정도의 과감함이라면 양손 주먹도 조금 잘라먹을 수도 있지 않겠어? 다 보여주지 않아도 돼. 주먹 쥐고 있다는 의미는 사라지지 않잖아. 주먹을 좀 잘라먹으니깐 덕분에 <국민이 이긴다>라는 메시지를더 키울 수 있었어. 모든 벽보는 인위적이게 마련인데, 후보이름 글자가 다소 희미하게 보이도록 하고, 뒤에 그림자도 그대로 놨두니까 현장감이 살아났어. 대신 <국민이 이긴다>라는 메시지로 정당소속과 촛불민심 모두를 간명하게 나타냈어. 이거 보통 수완내기가 아니야. 디자이너는 (습관적으로) 생각했을 거야. 독자가 이미 다 아는 것을 굳이 부연해서 더 설명할 필요 있나요?  본질만 남기고 다 없애자꾸나. 어쨌든 이런 기이한 결과물이 나오려면, 기획자와 디자이너 모두 확신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소통이 재빨라야하지. 그러려면 관여자가 적은 게 낫겠지. 사람이 부족하니까 더 나은 결과를 냈다는 생각이 드네. 물론 익숙한 형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본래 안철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고 비난하겠지. 후자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렵고, 전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 보자. 사람들은 은근 보수적이어서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도를 별로 안 좋아해.

*

이번에는 문재인 후보의 벽보를 봐볼까? 왼쪽이 이번 포스터, 오른쪽이 18대 포스터. 전체적으로는 18대보다는 19대가 더 낫다고 봐. 18대 포스터는 ‘나, 잘 생긴 남자거든’ 정도 말고는 어필하는 게 없어. 대통령 선거는 인물 뽐내기는 아니니까. (우리 명박 각하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니?) 이미지와 서체, 좋아졌어. 단, 너무 정답 같다는 게 흠이라면 흠.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과 후보의 얼굴 표정에 어울림이 없다는 생각도 들어. 웃는 얼굴과 메시지가 잘 매치가 안 되네. 메시지만 놓고 본다면 ‘든든한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지지자들의 강박관념이야. 그냥 ‘나라를 나라답게’, 이렇게 간단한 문구가 나았을 텐데.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아래에 보이지도 않는 글귀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는 촌스럽게 모니. 아마 적지 않은 사람이 이 벽보에 관여한 것 같아. 그 중에는 정답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고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지. 자칭타칭 전문가가 많은 곳에서는 정답 비슷한 결과가 나오게 마련. 모험과 새로운 시도는 조직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기각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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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홍준표 후보와 유승민 후보의 벽보를 봐 볼까. 진보는 분열해서 문제라고? ㅋㅋㅋ 보수가 분열하면 이꼴 나.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벽보만 봐도, 얘네들 되게 초라해졌네. 라는 생각이 물씬물씬 풍기네. 이 두 벽보만 놓고 본다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에게 붇고 싶네. “당신 능력이 몬데요?” 안 궁금해요. 반면 홍준표 후보의 “지키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 이거 참 재밌네. 바로 옆에 기호 1번 문재인 후보잖아? 그러니까 홍준표의 메시지가 보수층 유권자에게 어필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유승민 후보 옆에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잖아? 그러니까 유승민의 메시지가 죽어버려. 디자인은 희망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작업이야. 이때 디자인은 그것의 앞뒤와 좌우 옆도 함께 봐야 해. 결과적으로 유승민 후보의 벽보 디자인은 보수층 유권자를 어필하기 쉽지 않을 거야. 홍준표 후보의 포스터가 여러 모로 웃기기는 하지만, 유승민 후보보다는 백배 낫다고 본다.

*

다음은 짜자잔.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 이번에는 완주할 것이라고 본다. 완주하지 않을 리가 없다. 벽보 구도와 이미지, 물씬 풍기는 감성. 난 마음에 들어. 멋쟁이 사진이야. 그런데 말이야.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야. 이것은 많은 사람이 착각을 하더군.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야. 감성은 부족해도 돼. 의미를 살려야지. 그런데 어째서 의미가 살지 못할까? 추상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메시지의 추상성은 그대로 둔채, 감성만 말랑말랑하게 하면 모해? “노동이 당당한 나라”,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 이게 모니 ㅠㅠ. 이런 건 진보가 아니잖아. 먹물이지. 추상에서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감옥에서 빨리 나오라고요. 그냥, 예전처럼 했으면 좋겠어. 불판 갈아버리겠다거나, 그냥 욕을 해. 그렇게 해서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해. 이런 말랑말랑함에 만족하는 거니?

심상정

*

그냥 여기까지, 완전히 재미로다가 개인적인 소감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느낌과 견해가 다르니까, 논쟁의 대상이 아니죠. 벽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의 대상. 이제 <현수막>과 <정책자료집>이 어떻게 나올지 매우 궁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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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메니데스 단편1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단편들(Fragments)에 대한 번역(작업중). Oxford World’s Classics의 를 영어 텍스트를 원본으로 삼았다.

*F1

내 마음이 소망하는 저 끝까지

마차는 나를 태웠지

나를 데려다 저 이름 높은

여신의 길 위에 세울 때까지

여신께서는 모든 곳으로 나를 이끄시어

온전한 지식을 알려주었지

나는 달렸네

저 빠른 말들은 마차와 팽팽해져

나를 태워 달리니

천사들이 나를 안내했네

마차 바퀴 차축이 새된 피리같이

소리 내며 점점 날카롭게

양쪽 바퀴가 돌고 도니까

세차게 앞을 재촉하니까

그리도 빨리 태양의 딸 천사들이

마차를 운전하니

밤의 거처를 떠나

빛의 입구에 이르렀지

천사들은 손을 내어 머리에서

베일을 벗어젖혔지

밤의 길이요 낮의 길이요

그 앞에 서 있는 문들이요

위아래로 석조가 둥글게

그 문을 감싸는 것이요

문은 창공에 나 있어

창공이 문틀을 가득 채우고

복수의 표정을 하는 정의의 신이

이 문의 잠금과 저 문의 잠금을 지배하니

천사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달콤한 말을 정의의 여신에게 내어

능숙하게 설득해서 그녀로 하여금

재빠르게 빗장을 풀어

천사들을 위해 문을 열어젖히게끔

하니 그 문들이 활짝 열리네

문틀이 하품하듯 큰 틈을 만드네

먼저 이 문, 그리고 다음 문

청동 피벗이 돌면서

못과 리벳이 나와 문을 고정하면

천사들이 마차를 다시 몰며

말들이 문을 지나서야

그 길에 이르렀지

여신께서는 나를 환대해주시며

내 오른 손을 잡아주시며

목소리를 내시어 이렇게 설교하셨지

젊은 인간이여,

불멸의 마부들이 쉬는 곳

나의 거처에 너는 이르렀노라

저 말들이 너를 데려다 주었으니

너를 환영하노라

어떤 불길한 운명도 없었구나

지체 없이 이 길을 달려 왔으니

필멸의 인간 세계에서는 참으로 먼 길

그들의 아픈 길을 초월한 길

그것은 올바름과 정의였노라

너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균형을 지닌 진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마음을

필멸에 대한 확신 속에는

어떤 진실한 믿음도 없음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너는 볼 것이다

믿음이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훌륭한 형태 속에서

모든 것이 함께 할 때의 넘쳐나는 충만함을

*

My carriage was drawn by the mares which carry me to the limits

Of my heart’s desire; they took me and set me on the renowned way

Of the deity, which takes a man of knowledge unharmed through all.

There I rode, for there the much-prompted mares were carrying me,

Straining at the carriage, and maidens were guiding my way.

The axle in its naves screeched like a pipe and glowed red-hot,

For the two wheels on either side were whirling and urging it on,

Thanks to the haste with which the maiden daughters of the Sun

Drove the carriage, having left the abode of night and entered the light.

They pushed the veils off their heads with their hands.

There stand the gates of the paths of night and days,

And a lintel and threshold of stone enclose them round about.

The gates are of aither and they fill the huge frame of the gate,

And vengeful Justice controls the alternating locks.

The maidens spoke soft and beguiling words to Lady Justice,

And cunningly persuaded her to take the pin quickly out of the lock

And pull it away from the gates for them; the gates opened wide,

Creating a yawning gap through the frame, as one and then the other

Turned in their sockets the bronze pivots which were fastened to them

With nails and rivets. Then the maidens steered the carriage

And the horses straight through the gate and down the road.

The goddess received me kindly. Taking in her hand may right hand

She spoke and addressed me with these words: “Young man,

You have reached my abode as the companion of immortal charioteers

*

*

F2

내가 시작된 곳은

경계 없는 한 곳

그곳으로 다시 나는

돌아갈 테니까

*

The point from which I start

Is common; for there shall I return again

*

*

F3

오라, 네게 말하겠노라,

– 너는 네 일부를 위해 내 이야기를 들으라

그리고 지나가라,

– 홀로 사유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길이 있나니.

존재하는 길과 존재되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있노라:

이는 믿음의 길이요 진리가 그 길에 동행하므로.

존재하지 않는 길과 존재되지 말아야 하는 길이 있노라:

이는 네게 보여주는 것처럼 아주 잘못된 길이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네가 모를 것이며

– 그 끝이 없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네가 말하지 못할 터이며.

*

Come then, I will tell you ― and do you for your part listen to my tale

And pass it on ― of those ways of seeking which alone can be thought of.

There is the way that it is and it cannot not be:

This is the path of Trust, for Truth attends it.

Then there is the way that it is not and that it must not be:

This, as I show you, is an altogether misguided route.

For you may not know what-is-not ― there is no end to it ―

Nor may you tell of it.

*

*

F4

사고되는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은 사고되며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

*

For the same thing both can be thought and can be

*

*

F6

부재한 것을 지켜보아라

사고를 통해 흔들림 없이 현존하노라

존재함으로 한 몸이 된 것에서

존재를 잘라낼 수 없을 테니

내 세계 모든 곳으로 흩어지겠느냐

흩어진 것이 다시 모이겠느냐

*

By thinking gaze unshaken on things which, though absent, are present,

For thinking will not sever what-is from clinging to what-is,

Whether it is scattered at random everywhere throughout my composition,

Or whether it comes together

*

*

F7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는

결코 해낼 수 없을 터이니

구하지 말라 그런 생각을 금하라

너는 중독되지 말라

그 길에서 시련은 충분하나니

목적 없는 눈이며 소음 가득한 귀며

그리고 혀

내가 선언한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이 시험에

너는 이성으로 판단하라

*

For never shall this be overcome, so that things-that-are-not are;

You should restrain your thinking from this way of seeking.

And do not let habit compel you, along this well-tried path,

To wield the aimless eye and noise-filled ear and tongue,

But use reason to come to a decision on the contentious test I have announced.

*

*

F10

어떻게 지구와 태양과 달이

어떻게 만물을 바라보는 저 창공이

어떻게 은하수가, 저 먼 곳의 하늘이

그리고 저 별들의 뜨거운 힘이, 그 요동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

How earth and sun and moon,

How the aither, shared by all, the Milky Way, the outermost heaven,

And the hot force of the stars, all strove to come into existence.

*

*

F11

이제 빛과 어둠이 모든 호명을 받았으므로

그 힘에 따라 이것으로 저것으로 나타나나니

모든 것은 빛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것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둘은 같고

둘은 없음을 포함하지 아니하므로

*

Now, since light and night have been given all names

And been predicated of this and that in accordance with their powers,

Everything is full of light and dark night at once,

And of both equally, since neither of them contains what-is-not.

*

*

F14

여신께서 이 세상에 내신 모든 신 중에서

그 첫 번째 신이 바로 사랑이었노라

*

The very first of all the gods she devised was Love.

*

*

F15

저 외계의 빛이 지구를 유랑하는구나

밤에 빛나는 저 빛

*

An alien light wandering around the earth, shining in the night.

*

*

F16

빛의 줄기를 항상 보라

*

With gaze always fixed on the rays of the s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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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국어

모국어

*

수카니라아가 크게 울었는데 암카나리아가 있었습니다. 암카니리아가 남쪽으로 떠났습니다. 카나리아는 체념, 평화, 침묵, 제스처, 웃음, 저녁, 단단한 돌을 모아서 꽃을 붙이고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요새를 만드는 데 오 년, 오십 년, 오백 년 걸렸습니다. 카나리아는 카나리아를 잊었습니다. 깃발을 꽂고 휘장을 붙였습니다. 요새가 가장 단단해졌을 때 카나리아가 돌아왔습니다. 그 요새는 그날 무너졌습니다. 수카나리아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암카나리아가 편하게 나뭇가지 위에 앉습니다.

*

**

***

나는 왜 쓰는가

좋은 질문이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1.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그 반대는 좀처럼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나는 내 모종의 생각을 글로 붙들어 매거나 혹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생각을 캐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나 할까.

2.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연스럽게 <나는 왜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에 이르게 되는데, 아마도 <내가 보기에 무엇이 올바른가>라는 다소 무거운 이유와 <나는 무엇을 더 좋아하는가>라는 다소 가벼운 이유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야. 그런 귀찮은 이유에 휘둘리지 않고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기는 한데, 나는 그런 인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남의 인생을 살고 싶지 않고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나는 누군가 내 인생을 함부로 조작하고 통제하기를 원하지 않고 가능한 한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고 싶어.

3. 세상에는 여러 집단이 있잖니. 그리고 많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잖니. 나는 함부로 어느 집단에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이 나를 침범하게 두고 싶지 않아. 근래 이르러 어느 정도 단단해지기는 했는데, 나는 하나의 공화국이며 이 세상과 나는 거의 동등하다고 생각해. 물론 이것은 참 편리한 궤변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 세상은 큰 힘을 갖고 있지만 내 힘은 보잘것없으니까. 하지만 내 정신세계는 권력, 재력, 무력, 영향력, 인맥 따위의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힘이 작용하는 구조적인 세계와는 다른 우주라고 생각해.

4. 말하자면 나는 내 정신세계에서 함부로 침범해 있으며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는 남의 생각을 추방하기 위해서 생각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럴 때마다 나는 자유를 획득해. 이것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일이며, 빼앗긴 나를 되찾는 일이고, 상처 입은 나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라는 공화국은 내가 분명해질수록 더 강해지고 활발해져.

5. 하지만 생각은 자꾸 휘발되니까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니까 그것을 잡아두기 위해서 글을 쓰게 돼. 생각은 참 가벼워서 형태가 없어. 글은 생각에 호흡을 넣어주지. 그러면 생각은 생명력을 갖게 되고 형태를 갖추며 발육을 한단 말이야. 또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면 참 신기하게도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생각도 불쑥불쑥 떠오르잖니.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겠네.

6. 나는 학자가 아니어서 특수한 연구과제를 설정해서 엄밀하고 엄격한 태도로 생각하지는 않아. 가급적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관망하다가 어느 순간 그 부유하는 것들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편이야. 그래서 다양한 사념과 정념과 잡념이 나를 이끌어가는 대로 놔두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낯선 경험과 묘한 이야기를 경청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두기도 해. 그러면서 내 안에서 생성되고 부유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밖으로 꺼내어 놓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 글을 쓰잖니. 그런데 훈련 없이 잘 안 되니까. 습관을 통해서 익히는 기술이 필요하긴 할 것 같아. 글쓰기 습관. 내 안에 있는 것을 내 바깥으로 꺼내어 놓는 작업술, 희랍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대. 포이에시스.

7. 어쨌든 그렇게 다양한 생각으로 글을 쓰다 보면 내 생각이 내 자신에게 매혹적이고 풍요로워져서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과 거의 동등해진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그러면 ‘나’라는 공화국은 이 세상과 큰 무역을 준비하게 되지. 출판을 시도해. 그렇게 해서 6권의 책을 낸 것 같고, 지금 같아서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수십 권의 책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책이 이 세상에 얼마나 이로울지는 두고 볼 일이고, 적어도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지는 않을까?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인생을 살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또 행하고.

*

**

***

DOWN BY THE SALLEY GARDENS

DOWN BY THE SALLEY GARDENS (1889)

버드나무 정원에서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

Down by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버드나무 정원을 따라 내 사랑과 나는 만났지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그녀는 눈처럼 흰 작은 발로 그 정원을 지났네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사랑을 느긋하게 여기라고 그녀는 말했지, 나무에서 자라는 잎처럼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그러나 난 어리고 또 어리석어서 그 말을 따르지 못했네

*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강가 어느 들판에서 내 사랑과 나는 섰네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기울인 내 어깨 위로 그녀는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인생을 느긋하게 여기라고 그녀는 말했지, 둑 위에 자라는 풀처럼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그러나 난 어리고 또 어리석어서 이제는 눈물만 흐르네

*

**

***

WHEN YOU ARE OLD

2011년에 번역했던 시. 떠난 사랑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는 시. 예이츠의 인생을 보면 누구나 아는 그런 사연이 있기는 하다.

*

WHEN YOU ARE OLD(1893)

그대 늙거든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잠이 많아질 때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화로 옆에 앉아 잠이 올 때 이 책을 꺼내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천천히 읽으며 그 부드러운 표정을 떠올리세요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한때 그대의 눈이 그랬죠, 그 깊은 속눈썹

*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얼마나 많은 이가 그대의 빛나는 젊음을 사랑했던가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지요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그러나 그대 안의 순례자의 혼을 사랑한 남자가 있어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늙어가는 그대 얼굴에 어린 슬픔도 사랑했지요

*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타오르는 화로 옆에 숙이고 앉아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서글프게 말하시겠죠. 사랑은 달아나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저 산 위를 거닐다 하늘 높이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수많은 별 사이로 얼굴을 감췄노라고

*

**

***

송구영신

– 2016년을 보내며

*

어떤 편지는 그곳까지 이십 년이 걸리고

어떤 진심은 느리게 전해진다.

지난 겨울은 힘겨웠고 이번 겨울은 반갑다.

그사이 세월이 있다.

젊고 건강한 나무처럼 자랐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고 나와 함께 자라는 나무가 있다.

나는 거울을 닦았다.

어제 닦지 못한 곳은 오늘 닦았다.

진심 말고는 세상에 보여줄 것이 없다.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나는 그런 것에 연약하다.

나는 다스릴 수 없다.

아예 불가능한 꿈을 꾼다.

지배 없는 작은 사회를 만들자.

거울이 또 이렇게 깨끗해졌노라며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나무에게 보여주었다.

키가 이만큼 컸고 새해가 발목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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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여, 안녕

지극히 오랜만에 쓴 시. 제목 없이 그냥 되는대로 썼다가 업로드하면서 급히 제목을 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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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ckr-credit-bettaman

 

<이팝나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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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여, 너는 백 년 동안 거기에 있었구나.

그사이 향기를 잊고 망설이는 나무여,

여기 슬픈 눈이 소리 없이 묻는다.

네 꽃차례는 어디에 있으며 유월의 숲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그 숲 속에 있던 남자의 사진과

그 숲에서 나와 나무로 만든 책을 주고받았다.

어디 보자, 쓸모없는 계절에도 나이테가 생긴다.

세상 모든 길이 어둠 속으로 귀가할 때

이팝나무여, “안녕”

 

– 이리하여 나는 내 우주로 돌아왔다. 이곳은 꿈과 체념이 각양각색으로 섞이면서 나와 그대의 통치를 없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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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찾는 여자에게

이 글은 2013년 6월에 여자 인생 후배인 K에게, <남자론>이라는 제목으로 쓴 이메일 내용입니다. 그녀는 올해 결혼했고 제가 그 결혼식 주례를 맡았습니다. 아마 이 글이 ‘조금’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다시 이 글을 제가 받았으므로 여기에 공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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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론>

지금까지 아주 많은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남자들을 만났죠. 내 주위에 좋은 여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꽤 괜찮은 남자들은 적습니다. 솔로여자와 솔로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경험을 종합해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진화가 더디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함수가 있습니다. X축은 시간이며, Y축은 성장도입니다. 남자의 시간함수와 여자의 시간함수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남자의 시간함수가 여자의 시간함수도 더 다이내믹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보이는 진화의 기울기가 여자보다 좀더 큰 것 같습니다. 10년 후, 20년 후 혹은 30년 후의 남자의 변화된 모습이 여자의 경우보다 훨씬 달라진다는 이야기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변화를 염두에 두고 연애를 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대략 젊었을 때의 남자는 그저 꽃봉오리에 불과합니다. 아직 그 꽃이 피지 않았으므로 어떤 형태의 어떤 색깔의 꽃이 필지 수 없습니다. 열매는 더더욱 알기 힘들죠. 그럼에도 여자는 아직 꽃봉오리에 불과한 남자를 선택해서 연애를 해야 합니다. 원하는 않는, 좋아하기 어려운 꽃이 펴서 여자는 당황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때때로 내 남자의 꽃이 피지 않는 경우도 생깁니다.

여자의 심리는 잘 모릅니다. 나는 함부로 <여자론>을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남자인 까닭에 남자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압니다. 이 글의 화자가 남자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꽤 큰 기울기를 가지며 성장했으며 또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참고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경험과 직관을 이용해서 <남자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합니다. 육체적인 전성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자는 사람 나이 50세를 두고 “지천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공자는 아마도 남자를 염두에 뒀을 것입니다. “지천명”은 하늘의 이치를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이 점 지어 둔 자기 인생의 그릇이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비로소 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는 곧 자기를 알게 되는 나이를 의미합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50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젊었을 때에는 화려했으나 초라하거나 가엽게 늙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 반대로 젊었을 때에는 보잘것없었으나 늙어서 창대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일까요? 남자의 인생은 여러 번 요동칩니다. 남자론의 대전제는 50대 이후에 인생의 전성기가 찾아올 거라는 점입니다. 얼굴에 핀 주름의 멋이 남자의 전성기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남자의 시간함수와 인생의 전성기를 생각하면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자 또한 자기의 현재 모습을 좀더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요.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깊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지금 당장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가만히 앉아서 따져보고 대변과 차변을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두근거림이요 혼돈이요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미 사랑에 휩싸인 여자를 앞에 앉혀 두고서 차분히 남자론을 들이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랑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은 여자와 심심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여기 사랑할 남자를 찾고, 선택하고 연애를 하는 여자를 위해서 몇 가지 정보를 남깁니다. 냉정하고 심심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를 위해서도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남자의 무엇을 관찰할 것인지, 여자가 남자의 어떤 점들을 관찰할지에 대한 정보입니다. 재산, 직업, 외모, 꿈, 목표, 가치관 같은 것들은 시간에 따라 너무 가변적입니다. 그런 가변적인 것들에 여자는 쉽게 매혹되곤 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 매혹된 눈을 가진 여자들의 눈물을 우리는 압니다.

남자에 대한 10가지 관찰항목을 이제 말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필연적이기도 하고 우연적이기도 합니다. 나 혼자의 능력에 의해서 인생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으며, 수많은 기회가 우연을 몰고 옵니다. 기회가 한 남자의 인생의 문지방 위로 넘나듭니다. 좋은 우연을 많이 부르는 인생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필연적입니다. 어떤 남자에게는 기회가 많이 찾아오는 반면에, 어떤 남자에게는 기회가 메마릅니다. 성공과 실패는 우연적이지만 때때로 오랜 시간 축적된 필연성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열거하는 항목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얼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다섯 가지 관찰 항목을 열거합니다.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항목입니다. 그 남자는:

(1) 전화 목소리가 괜찮나요?

(2) 어른에게 예를 갖추나요?

(3) 자기 자신을 사랑하나요?

(4) 병과 정에게 친절한가요?

(5) 현재 일을 즐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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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화 목소리가 괜찮나요? (신뢰와 기회)

(1)번 관찰항목은 “신뢰”와 “기회”에 관한 것입니다. 전화 받는 목소리는 타인에게 신뢰를 줍니다. 친애하는 상대방에 대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평상시의 목소리에 대한 것입니다. 전화 받는 목소리가 좋으면 틀림 없이 실제 만났을 때에도 퍽 괜찮을 것입니다. 사회 활동을 하는 남자에게 신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회”입니다. 신뢰는 기회를 부릅니다. 전화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전화 목소리가 나쁜 사람보다는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 남자의 전화 목소리를 경청하십시오. 공격적인 목소리, 무관심하고 매정한 목소리, 귀찮은 듯한 목소리가 반복된다면 당신은 머뭇거려도 좋습니다.

(2) 어른에게 예를 갖추나요? (상식에 대한 태도)

(2)번 관찰항목의 키워드는 “상식”입니다. 어른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남자가 “상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상식을 항상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상식에 반대되는 주장과 신념을 가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태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른을 마음속으로 존경하지 않더라도 예의를 표하면 그 남자도 타인의 예를 받을 것입니다.

(3) 자기 자신을 사랑하나요? (발전 가능성)

(3)번은 “발전 가능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지 여부는 남자의 발전 가능성을 나타내는 리트머스입니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자기 발전의 밑거름이자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자기애와 자존감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보다는 사랑하고 믿어주는 동력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갖는 태도가 너무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당신에게는 다른 관찰 항목, 예컨대 (4)번이 있으므로 괜찮습니다.

(4) 병과 정에게 친절한가요? (천성)

(4)번은 “천성”입니다. 갑을병정 관계에서 갑에게 친절하다거나 을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그런 친절함은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친절함은 가공되고 계산되며 인위적인 따뜻함이거나 냉정함입니다. 그 남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병과 정에게 친절하게 대하는지를 살펴본다면 그 남자의 천성을 볼 수 있습니다. 종종 여자들은 냉정하고 차가운 남자, 나쁜 남자에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끌림의 대가는 그 여자의 몫입니다. 여자의 인생을 위해서 천성이 따뜻한 남자를 권합니다. 천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 성품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십 년 성장의 흔적입니다.

(5) 현재 일을 즐기나요? (열정)

(5)번의 키워드는 “열정”입니다. 현재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남자가 좋습니다. 그것은 곧 책임감입니다. 반드시 경제적인 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경제적이지만 의미 있는 일도 많습니다. 현재 그 남자가 아침부터 오후까지 줄곧 임하고 집중되어 있는 무엇입니다. 현재만이 미래를 낳습니다. 모든 열정은 현재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를 부정하고 미래를 탐하기만 하는 자세는 열정이 아닙니다. 공상일 뿐입니다. 물론 그 남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지금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젊은 나이의 남자는 그걸 잘 모릅니다. 남자의 사고, 취향, 목표의식, 꿈 같은 것은 변화하고 진화하기 때문에 현재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자주 변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일을 하고 있으며, 열심히 – 마치 즐기듯이 –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문득 혹은 서서히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 도중에 관계가 바뀌거나 환경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실함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변화된 관계와 변환된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실함과 열정은 당신에게도 전염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부정적이고 몽상적인 태도 또한 아주 강한 전염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노동의 신성함에서 벗어나 있는 남자는 당신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위와 같은 다섯 가지 항목은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항목에서 좋게 평가된 남자라면 연애해 볼만 합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할 연애인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를 이제 말하겠습니다.

앞의 항목보다는 좀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때때로 실제 연애를 해야만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머지 다섯 가지 관찰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남자는:

(6) 미추(美醜)에 민감하나요?

(7) 부모한테서 독립했나요?

(8) 사생활을 중시하고 존중하나요?

(9) 술버릇을 참아줄만 하나요?

(10) 쪽팔림을 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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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추(美醜)에 민감하나요?

(6)번 관찰항목의 키워드는 “변화”와 “관심”입니다. 남자는 진화해야 하며 더 성장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의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태도는 진화와 변화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별하려는 태도, 예쁨과 예쁘지 않음을 구별하려는 남자의 태도는 아주 유용한 정보입니다. 미추에 대한 민감함은 대개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작은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미추에 대한 쾌감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게다가 그 영역은 계속 확장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수용하는 게 “큰 것”을 수용하는 것보다 쉽고 빠르며, 작은 것이 누적되어 남자는 크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미추에 민감하면 상대적으로 완고함이 적어집니다. 변화를 보다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미추에 둔하면 어떤 사물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깊은 애정이나 관심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미추는 미묘한 차이에 민감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주 커다란 것에서 유래되는 행복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대개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인간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더 자주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추에 민감한 남자는 당신의 예쁨을 여러 각도로 인식하고 인정하거나 조언을 해줄 것입니다.

모든 남자가 미추에 민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민감성이 전혀 계발되지 않은 남자도 많습니다. 그 경우에 여자가 그 민감성을 건드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서, 예쁨과 예쁘지 않음에 대해서 많이 대화를 하세요. 패션도 좋고, 디자인도 좋습니다. 그런 시각적인 것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문학도 좋고 미술도 좋습니다. 물론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괜찮겠지요. 단,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발육하게 됩니다.

(7) 부모한테서 독립했나요?

(7)번 항목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연애하고 있는 남자가 아직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마마보이와는 결혼하지 마십시오. 여자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심은 정신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혈육”과 “가족”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며, 자기 아내를 지켜줄 수 있는 심리상태인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대개의 정신적인 독립성은 경제성에 의존하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도 부모에 종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의 경제적 자립은 매우 중요한 항목입니다. 아직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했고, 부모의 경제성에 종속되어 있는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의 인생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음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남자는 결혼 전까지는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결혼 후에 느닷없이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여자는 종종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부모와 결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어쨌든 마마보이 혹은 지나치게 부모의 간섭에 저항하지 못하는 남자와 헤어졌다면 신의 배려입니다.

(8) 사생활을 중시하고 존중하나요?

(8)번 관찰항목의 키워드야말로 “배려”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여자의 생각과 인간관계가 남자에 종속돼야 하는 것은 옛날 이야기가 됐습니다. 당신은 옛날 남자를 찾는 게 아니라 현대의 남자를 찾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거나 참견하거나 대화의 화제로 삼는 남자를 피하십시오. 그런 남자와 함께 살면, 설화를 당하거나 이상한 일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적절하게 경계를 유지하며 자기 사생활을 중시하고 또 남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남자라면 당신 인생도 배려해 줄 것입니다.

(9) 술버릇을 참아줄 만하나요?

(9) 술 버릇이 안 좋은 남자를 멀리하십시오.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람과는 교류를 끊으십시오. 술 마시고 일탈하는 남자를 조심하십시오. 술을 마셨으니까 봐줘야지가 아니라 술을 마시고 “나쁜 행동”을 했으므로 더 가중하여 멀리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폭력을 행사하는 나쁜 남자도 괜찮다면, 윤창중과 같은 남자를 원한다면, 이 항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10) 쪽팔림을 아나요?

(10) 염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잔인한 남자는 무섭습니다. 염치를 알고 쪽팔림을 알면 잔인해지지 않습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아빠가 됩니다. 아이는 염치를 모르는 아빠를 보고 자라므로 아빠로서도 좋지 않은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쪽팔림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멀리 하십시오. 부끄러움을 알면 일탈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모르면 일탈하고, 폭주하며 잔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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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제를 선호하는 이유

나는 내각제 개헌을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관료/정치인/재벌 등 힘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책임의식이 부족한 이 상류 문화에서 한 사람에게 강력한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구조가 사회 발전의 큰 저해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합니다.

둘째 국민의 통제가 아닌 최고 권력의 통제가 관료 체제를 지배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통령제 하에서 국정감사가 형해화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국가 행정의 상당수의 역량은 국회 국정감사를 대비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투자되는 역량에 비해서 최고 권력의 통제권한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국가 행정기관의 책임성과 자율성은 현저히 적고, 청와대 눈치만 봅니다. 그렇다면 국회의 권한을 축소하든가 아니면 행정기관의 책임성을 강화하든가 두 개의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 경우 저는 후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역시 내각제입니다.

셋째 논쟁과 설득이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 하에서 여당 또한 레임덕이나 탄핵심판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사실상 청와대 권력 하에 통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에서 강력한 여당은 허수아비가 되고 그러므로 야당과의 논쟁과 설득은 공론만을 양산하며 그것이 정치 불신이나 혐오의 씨앗이 됩니다. 대의기관에게 권한과 책임이 있어야 제대로 논쟁과 설득이 만들어지고 그래야만 제대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넷째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의 권한이 강조됨으로써 소수 정당의 힘도 더욱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제 시스템에서는 소수 정당은 항상 권력 바깥에 있을 뿐이며 집권할 수도 행정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각제 하에서는 한두 의석 사이로 정권의 향방이 결정되기도 하며 연정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어서 소수 정당이 오히려 이니셔티브를 주면서 국가행정에 참여할 기회가 생깁니다.

다섯째, 내각제에서는 권력의 권한과 국민의 지지가 서로 연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에게 매우 강력한 권력이 부여됨에 비해서 국민의 의사와 의지에 의해서 그 권한을 통제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탄핵심판 절차라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통령의 무책임과 무능과 일탈을 견제할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반면 내각제에서는 국회해산과 총선을 통해서 다시 민의를 수렴할 수 있습니다. 국회해산과 총선을 두고 혼란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의의 수렴은 혼란이 아닙니다. 권력과 국민 사이에 지나치게 위험할 정도로 틈이 벌어졌다면 그것을 다시 국민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에 있고 그 선거를 혼란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내각제를 채택하고 일본 정치를 보라고 말합니다. 전후 일본 정치가 한국 정치보다 무엇이 나빴는지 의문입니다. 쿠데타, 군부독재, 민주주의 탄압, 대통령의 나몰라라 미용 시술은 일본 정치에서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자민당 장기 집권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일본 국민의 민의입니다. 내각제는 일본만 채택하고 있는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영국과 독일을 비롯해서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내각제에서는 위험한 선동가나 무능한 인물이 강력한 권력을 쥐기 어렵습니다. 국민은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시스템이 내각제 하에서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나는 내각제 개헌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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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reamed a dream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판틴의 노래. 영어 원문가사에 대한 한국어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재번역하였습니다.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되, 한국어 가사로도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영시가 자연스럽다면, 번역된 한국어 시도 자연스러워야 함은 물론이고요. 시답게 라임은 맞추었고 리듬도 생각하면서 번역, 더 좋은 번역이 되려면 노래에 맞아야 하는데.. 그것은 생략합니다. 대략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I dreamed a dream 나는 꿈이 있었죠

 

There was a time when men were kind 남자들이 상냥한 시절이 있었죠

When their voices were soft 그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And their words inviting 내 마음을 이끌었지요

There was a time when love was blind 사랑에 눈먼 시절이 있었죠

And the world was a song 세상은 노래였고

And the song was exciting 노래는 내 마음을 설레게 했어요

There was a time 그런 시절이 있었죠

Then it all went wrong 그런데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말았네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지난날 나는 꿈이 있었죠

When hope was high 그때 희망은 넘쳤고

And life worth living 인생은 참 살만했어요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사랑은 절대 죽지 않으리라는 꿈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신은 자비로우실 거라는 꿈

 

Then I was young and unafraid 그때 나는 젊고 겁이 없었죠

And dreams were made and used and wasted 꿈을 만들고 쓰고 낭비하고

There was no ransom to be paid 속죄할 대가는 없었어요

No song unsung, no wine untasted 부르지 않은 노래, 마시지 않은 술이 없었네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그러나 굶주린 짐승들이 들이닥쳐요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끈적한 목소리가 밤 벼락처럼 덮쳐요

As they tear your hope apart 그들은 당신의 희망을 갈갈이 찢어버려요

As they turn your dream to shame 당신의 꿈을 수치심으로 바꾼다고요

 

He slept a summer by my side 그는 내 곁에서 한여름을 보냈죠

He filled my days with endless wonder 끝없는 경이로움으로 나를 채웠죠

He took my childhood in his stride 그이는 내 순정을 앗아갔어요.

But he was gone when autumn came 가을이 오자 그는 떠났네

 

And still I dream he’ll come to me 나는 아직 그가 돌아올 거라는 꿈을 꿔요

That we will live the years together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꿈을

But there are dreams that cannot be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있지요

And there are storms we cannot weather 헤쳐나갈 수 없는 폭풍도 있어요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그 꿈에서 내 인생은요

So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지금 같은 지옥과는 아주 다른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지금 내 처지와는 아주 다른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 하지만 인생이 내 꿈을 죽여버렸네, 내가 꾼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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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my own

레 미제라블의 <on my own>을 번역해 본다. 한국 초연할 때 번역된 노랫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뮤지컬 레 미제라블 가사 번역 전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에포닌의 절절한 마음이 한국어 노래에서는 잘 전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번역. 일상언어이면서 동시에 라임과 리듬을 맞추면서 곡에 맞게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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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my own 나 홀로

Pretending he’s beside me 그이가 곁에 있는 것처럼

All alone 혼자서

I walk with him till morning 함께 맞이하는 아침

Without him 그이 없어도

I feel his arms around me 그의 두 팔이 감싸 와

And when I lose my way I close my eyes 길을 잃으면 나는 두 눈을 감지

And he has found me 그럼 그이가 나를 찾지

 

In the rain the pavement shines like silver 비가 와, 은빛으로 반짝이는 도로

All the lights are misty in the river 강물은 가로등으로 빛나고

In the darkness, the trees are full of starlight 어두워도 나무는 별빛 가득히

And all I see is him and me forever and forever 이 세상은 그이와 나 영원히 영원히

 

And I know it’s only in my mind 알아요. 혼자만의 상상이란 걸

That I’m talking to myself and not to him 그 없는 나만의, 나한테하는 혼잣말

And although I know that he is blind 그이는 아무것도 몰라줘요

Still I say, there’s a way for us 그래도 우리를 위한 길은 없을까요

 

I love him 사랑해

But when the night is over 하지만 이 밤이 지나면

He is gone 그는 가

The river’s just a river 강은 그저 강이야

Without him 그이 없으면

The world around me changes 빛나는 세상은 모두 변하고

The trees are bare and everywhere 나무는 헐벚고 모두 마르고

The streets are full of strangers 거리는 온통 낯선 사람들로만

 

I love him 사랑해

But every day I’m learning 하지만 난 매일 깨달아

All my life 내 인생

I’ve only been pretending 난 짝사랑으로 살았네

Without me 나 없어도

His world will go on turning 그이는 잘 살아가겠죠

A world that’s full of happiness 그 세상 그 가득한 행복

That I have never known 그건 내가 모르는 행복

 

I love him 사랑해

I love him 사랑해

I love him 그이를 사랑해

But only on my own 하지만 나 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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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in’ in the wind

딸을 위한 <Blowin’ in the wind>

지난 주부터 틈만 나면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부르니까 아이들도 그냥 흥얼거린다. 오늘 딸이 샤워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샤워 끝나자마자 아빠한테 가르쳐달라고 한다. 나는 아직 딸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따님용 버전은 메타포를 없애고 그냥 내멋대로 가르쳐주기로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남자가 남자가 되려면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 아니?

평화롭게 쉬기 전에

여자가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아니?

영원히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포탄으로 죽었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옛날 옛적에 산이 깎여서 바다가 됐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옛날 옛적에는 자유가 없었대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로 죽었을까?

나쁜 짓을 봤는데도 고개를 돌리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어째서 노예들은 하늘을 보지 못할까?

하늘이 저렇게 예쁜데

어째서 사람들은 귀를 막고 살까?

이쪽 저쪽 울고 있는데

언제까지 사람들은 모른 척 할까?

저러다가 연약한 사람들 다 죽겠네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해 봐 하나애

바람이 불 때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Blowin’ in the wind> 바람에 날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Before you call him a man ?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저 흰 새는 얼마나 많이 날아야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 모래밭에서 쉴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야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 영원히 멈추게 할 수 있을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Before it’s washed to the sea ? 산이 바다로 떠내려갈까?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돌리며

Pretending he just doesn’t see ? 또 외면하는 것일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들어야

Before he can see the sky ? 하늘을 볼 수 있을까?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나서야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 그는 그 죽음을 알게 될까?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그 답은 바람에 날려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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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인가 교양인가

<네트 세계에서의 개인정보에 관해서>

나는 매우 리버럴하지만 개인 인권의 경계를 함부로 넓히는 것에는 반대한다. 경계를 너무 넓히면 정작 인권으로 보호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상대화된다.

나는 페이스북에 나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아이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언젠가 프랑스에서는 자기 아이 사진 따위를 페이스북에 동의 없이 공개하면 부모가 처벌 받는다는 페북 담벼락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신문보도에서 초래된 이야기인데 아마도 사실확인 필요할 것이다. 개인의 사적인 행위를 국가가 함부로 개입하기도 어렵거니와 이를 처벌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주민번호나 여권 번호 등이 공개되면 위험하다는 정도는 누구나 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정보를 공개할 때에는 그런 민감한 정보를 제외한다. 하지만 출신/학교/직업 등을 내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하는 것은 일종의 타인에 대한 예의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네트 속의 나와 실제의 나는 거의 차이가 없다. 나는 그게 좋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단순하고 투명한 것을 선호한다.

타인에 관해서는 좀처럼 올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SNS 계정에 올리는 글은 나에 관한 글이며 이 세상을 향한 나의 발언이지 타인에 관한 글도 타인의 발언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내에 관해서는 거의 올리지 않는다. 그것은 아내와 합의된 사항이다. 명시적인 동의, 암묵적인 동의, 확고한 신뢰가 있는 경우에만 타인에 대한 정보를 페북에 공개한다. 아이들은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다. 물론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올리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은 내 페북을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또 보고 있다. 네트 세계의 각종 기록은 나와 내 관계에 관한 길고 두꺼운 기록이며 유언장이다. 설령 내 가족과 몇몇 사람들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한 개인의 기록유산에 불과할 뿐이며 혹시 문제라도 생기면 그저 삭제될 뿐이다.

인권에 대한 일반론적인 내 생각은 이러하다.

신체에 관한 일체의 권리와 내 생각의 표현에 관한 여하한의 권리는, 타인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는 조건하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존중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 조건조차 가급적 엄격하게 제한돼야 한다. <나의 인권> 영역에는 타인이 들어올 수 없고, 국가조차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인권을 나는 존중해야 한다. 인간 각자는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공평하지만 사람들은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위계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불공평이 생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은 더욱 존중되어야 한다.

현생 인류가 역사 속 인류와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다르다는 점이 아닐까? 거의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인류는 개인개인의 인권을 몰랐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고 긴 시간이 걸렸다. 약자의 인권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한편,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진보는 개인과 개인의 간격을 없애고 공유의 장을 넓혔다. 그 공유의 장에 어쩔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발적인 참여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전자는 기술적인 작용이며 후자는 문화효과이다. 기술과 문화의 공동작용으로 생긴 개인정보의 유출 문제를 인권의 시각을 보면 아주 곤란해지는데, 인권이라는 타인의 개입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권리라는 속성과 타인의 개입이 일상화되는 네트워크 세계의 속성이 충돌해버리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사자’가 네트워크를 안 하면 된다. 자발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어떤 개인에게도 그렇게 요구할 수는 없다.

이렇듯 나는 개인 정보를 인권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교양으로 본다. 내가 타인의 기분을 존중하고 입장을 배려하는 것처럼 내 기분도 존중되고 배려 받기를 원하는 교양. 인권과는 다르다. 인권이 침해 당하면 그것은 정의를 위협한다. 그러나 교양을 침해 당하면 그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다. 그런데 사람마다 교양이 다르다.

‘정보인권’이라는 단어를 발명해서 개인정보를 인권차원으로 승격시키는 사람을 종종 보지만 나는 동의하기 싫다. 낮은 차원의 개인정보로는 내 이름, 전화번호, 주소, 이메일주소, 사진이 있겠다. 이것이 타인에게 무단으로 유출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인권이 침해 당했다고 여기는 것은 지나치다.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런 정보를 스스로 공개하며 팔고 다닌다. 각종 SNS는 더욱 능동적이며 자발적인 공개를 촉발한다. 그리고 공유된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인권을 버리는 사람들일까? 어떤 공유는 괜찮고 어떤 공유는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인권이라는 가치를 희화한다. 인권은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중되어야 하는 가치가 인권이지 사람마다 다른 것은 인권의 범주로 함부로 논의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는 개인정보의 유출이 있어도 어떤 이는 분개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의 교양은 민감한 것이고 후자는 둔감한 것일 텐데, 타인을 배려한다는 문화수준에서는 기분 나쁘게 만드는 행위 자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 경우 인권을 운운하기보다는 문화수준 차원의 비난을 앞세우는 것이 좋고, 다른 법률의 존재를 찾는 게 낫다.

한국에서 휴대폰 번호는 고유정보이기도 하며 공유정보이기도 하다. 선거 때마다 정당구별 없이 이곳 저곳에서 광고용 메시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민주주의 정당이 인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는 없고, 그저 낮은 문화수준을 탓하는 게 더 적확할 것이다.

좀더 높은 차원의 개인정보로는 주민번호나 지문 같은 신체 정보가 있겠다. 이 또한 인권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람을 특정하는 고유 정보라는 특성이 있고, 자칫 범죄로의 오용 가능성이 있으므로 특별히 보호되어야 하겠지만, 주민번호나 지문이 생명에 관련된 것도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필수적이지 않다. 주민번호가 없다고 해서 인간존엄성이 무시되는 것도 아니며, 지문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거나 지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존엄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지문이나 주민번호를 알려줘야만 모종의 거래나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요구가 인권의 문제로 비쳐지는 것도 곤란하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적 교양의 문제이며 나는 그 교양에 굶주려 있다. 한편 지문이나 주민번호가 무단으로 유출되는 사고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인권침해 때문이 아니라 범죄로의 오용 가능성과 재산상의 손해 우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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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지식의종말

(제1편 지식의 시대) http://wp.me/p3Xhl1-ye

(이어서)

대중매체 9.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화하므로 산업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지식의 전파와 그것에 대한 옹호가 필요했다. 대중매체가 그 역할을 하였다. 근대 최초의 신문은 1605년 스트라스부르의 요한 카롤루스(Johann Carolus)에 의해 창간되었다. 이라는 주간신문이었다. 최초의 일간지는 1650년 였다. 권력은 언론을 좋아할 리 없고 높은 세금을 부가했다. 독자는 일부 부유한 층에 국한되었다. 18세기에는 여러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카페가 등장했다. 부르주아지는 신문을 읽으며 정치토론을 했다. 19세기가 되자 신문에 부가되는 높은 세금이 폐지되고 인쇄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노동자계급도 신문의 독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신문은 대중매체가 되었으며 지식은 더 빠르게 전파되었다. 20세기에는 방송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였다. 한편으로는 산업발전과 지식전파에 필요한 표준어의 보급, 문물의 소개, 문화소비의 자극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정치선동의 도구가 되었다. 반대파들은 권력이 대중매체를 억압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권력은 대중매체를 활용해서 반대파를 억압했다. 대중매체는 침묵하지 않으며 억압되기보다는 활용된다.

이성과 자유 10. 인쇄물과 대중매체를 통해 지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계급을 가로지르며 전파되고 국경을 넘어 공유되었다. 어떤 이는 지식으로 사상을, 어떤 이는 지식으로 민족주의를, 어떤 이는 지식으로 국가를 정립했다. 권력지향적인 지식은 대립을 격화시켰다. 어떤 이는 인류 사회의 개선하면서 지식을 활용하였고 어떤 이는 인류 사회를 악화시키면서 지식을 활용하였다. 전자는 이성을 투쟁적으로 자극하면서 권력을 지향하고 후자는 감정을 적대적으로 자극하면서 권력을 지향했다. 혁명과 전쟁이 발발했다. 이성이 승리할 때마다 인류 복리가 증진했고 감정이 승리함으로써 광기를 체험했다. 이성이 항상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무지한 곳에서 이성은 보잘 것 없었다. 지식은 자유와 함께 이성을 전파시켰다. 그러나 자유는 신분제와 관습을 이겨내야만 승리하였다. 1833년 영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4년간의 남북전쟁으로 60만 명이 넘는 군인의 죽었다. 수많은 죽음을 대가로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조선의 평화 11. 19세기 서구 인류는 사회 곳곳에서 자유를 회복하면서 자신감에 차 있었고 시끄러웠다. 지식이 전파되지 않았던 조선은 고요했다. 국민의 절반이 반은 인간이었고 반은 물건인 처참한 노예 상태였다. 노예 사회에도 평화는 있다. 무지가 전쟁으로부터 조선을 잠시 지켜주었다. 무지의 장벽이 걷힌 곳마다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12. 그 어떤 나이팅게일도 100만명이 넘는 군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1853년부터 3년 간의 크림전쟁의 참화였다. 1866년 보오전쟁으로 10만명이 죽었다. 1870년 보불전쟁으로 15만 명 이상의 군인이 죽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전쟁과 혁명을 겪을수록 자유의 이념은 뜨거워졌고 터질듯이 팽팽해졌다. 그것은 적대적인 자유였다. 남을 무찔러서 핍박하고 죽여야만 하는 자유였다. 그것은 광기의 서막이었다. 20세기가 되자 파멸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천만 명의 군인이 죽었다. 실종자와 부상자를 포함하면 물경 4천 만 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혁명을 둘러싸고 1922년까지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270만 명의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광기는 더 큰 광기를 자극했다. 적대적 자유의 극치인 파시즘이 등장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자행된 2차 세계대전에서는 2400만 명의 군인이 죽었고 50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죽었다.

전쟁 이후 13.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20세기의 광기의 잔해물을 해결하려는 전쟁이 국지적으로 이어졌다. 지역마다 광기의 지배가 여전했다. 그러나 광기를 체험한 서구 사회는 그 광기를 통제하기 위해 사회 시스템을 바꾸었다. 감정을 거두고 이성의 지배를 택했다. 지식은 적대감을 퍼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인 이념의 도구가 되었다. 여전히 국지적인 전쟁과 독재가 남아 있고, 전쟁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지식보다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노와 증오를 퍼뜨리고 있지만, 서구 유럽의 자유이념과 민주정치가 지구인의 보편적인 이성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은 인류사적 정치혁명이었다. 인류는 광기의 시절을 통과했다. 이제 권력지향적인 지식은 정치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지식은 시장에서 그 지배권을 찾으려고 하였다.

경제성장 14. 주요 국가의 1인당 GDP 그래프의 기울기를 살펴보면, 18세기를 시작점으로 하는 지수함수처럼 급격히 성장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21세기까지 그 기울기가 더욱 커진다. 급격한 경제성장은 식민지를 둘러싼 제국 간의 쟁탈에 의존하지 않는다. 지식의 거침 없는 확산이 시장의 크기를 늘렸다. 지식의 확산은 인프라의 확충과 기술의 발전에 큰 빚을 졌다. 교육 인프라, 발전/송전/배전 인프라, 국가행정조직, 방송통신인프라, 교통인프라 등은 필요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빠른 속도로 전파했으며 그 지식의 상품화를 가능하게 했다. 1948년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는 1959년 집적회로를 만들었다. 1971년 인텔은 세계최초의 마이크로프세서 4004를 선보였다. 1974년 개인용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모두 미국에서 벌어진 혁신이었다. 1989년 영국인 컴퓨터 과학자 팀 버너스리는 월드 와이드 앱의 하이퍼 텍스트 시스템을 개발해였다. 1994년 야후가 등장했고 1998년 구글이 창립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와 익스플러러와 오피스로 20세기말을 지배하였다. 모든 산업은 비단 정보통신분야뿐만 아니라 골고루 급격히 성장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가난과 질병과 무지는 상당히 해결되었다. 이런 경제적 성공에 감탄하는 사람이 보수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제적 성공 바깥에 있는 인류 문제를 개선하려는 사람이 진보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경제후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인류는 지구의 어떤 시대에 살았던 인류보다 아는 것이 많고 하는 것도 많다. 파국이 오지 않는 한 지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생긴 활력은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다. 큰 위기가 아닌 한, 이 활력이 저 활력으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사멸할 뿐이다.

지식의 종말 15. 지식은 권위였다. 인간은 지식을 통해서 성장한다. 지식을 취해서 정치를 하고 지식을 선점해서 시장을 장악했다. 지식은 인간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지식이 재산이며 지식이 경쟁력이었다. 쓸모 있는 지식을 선점한 자가 성공하였다. 그러나 좋은 시대는 금세 끝나고 말았다. 지식의 시대는 지식의 과잉에 의해서 그 권위가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터넷은 모든 사람의 생활이 되었고, 정보는 넘쳐 흐른다. 모바일 시대에 이르자 누구든지 지식을 생산하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지식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인류는 지식을 어렵게 접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사유로 이어졌지만 현대 인류는 지식을 쉽게 얻는 까닭에 덜 생각하게 되었다. 지식의 팽창은 경쟁의 심화를 낳았고 정보를 주는 대가로 사람들한테서 시간을 앗아갔다. 생각은 쉽게 얻을 수 있다. 남의 생각으로 편리하게 나의 생각을 대체할 수 있다. 지식은 검색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손 쉽게 지식을 생산하고 퍼뜨릴 수 있는 세상이 되자 지식은 잘 검색되지 않는다. 가짜 지식, 잘못되거나 과장된 정보는 네트워크 세상에 넘쳐난다. 정보는 흔하고 지식은 널려 있지만 묘하게도 그 지식을 자기 사유의 재료로 삼기는 힘들어졌다. 문이 너무 많다. 사람들은 들어가기 쉬운 문을 선호한다. 좁은 문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지식은 사라지지 않지만 너무 많은 지식에 의해 스스로 은폐된다. 우리는 푸시되며 키워드를 분양 받는다. 지식만으로는 더 이상 재산이 아니요 경쟁력도 아니다. 지식은 여전히 거래되지만 쓰레기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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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창의성의 비밀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3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50%를 넘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심사를 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줬는데 그 중 절반이 무효가 된다면 이는 부실심사의 증거입니다. 한국의 특허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특허청의 이런 부실심사 행정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1) http://wp.me/p3Xhl1-yv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2) http://wp.me/p3Xhl1-yK

(이어서)

마지막으로,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의 상관성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허무효율은 특허무효심판을 청구한 사건 중에서 관련 특허가 무효가 되는 비율입니다. 일부 무효를 포함시킬지, 각하/취하/절차의 무효를 포함해야 할지, 심급의 문제는 어떻게 할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또한 기술분야에 따라서도 달라지겠죠. 어쨌든 특허무효율은 무효가 청구된 특허 중 실제로 무효가 되는 비율입니다. 등록되어 있는 모든 특허의 잠정적 무효 비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특허경쟁력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변하는 사람을 나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먼저 누구의 특허경쟁력을 뜻합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허경쟁력? 국가 단위로 특허경쟁력을 따지는 것은 다소 몽롱합니다. 정부는 시장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국가의 특허경쟁력은 통계로만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해마다 얼마나 특허를 신청했다거나 등록했는지 따위의 통계입니다만, 흥미롭기는 해도 정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특허경쟁력이 높은 수준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반면 통계 수치로는 무엇이든 세계 탑5 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양적으로 뽐냈다고 질적인 탁월함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국가의 특허경쟁력을 분석해서는 통계밖에 얻을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시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장의 실질적인 주체는 기업이라고 볼 때, 결국 특허경쟁력은 기업의 특허경쟁력 위주로 살펴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거대한 생각의 늪 앞에 서게 됩니다. 시장은 복잡하고 기업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산업별로 특성과 환경과 요구가 다릅니다. 또 기업별로 규모와 역량과 전망이 다릅니다. 산업별, 기업별 이해관계는 천양지차입니다. 기업의 특허경쟁력을 제대로 탐색하려면 이런 요소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맞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고찰입니다. 이쪽에서 맞는 이야기가 저쪽에서는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령을 피우겠습니다. 산업과 기업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딱 하나의 분류만 생각해 보지요. 특허권자와 특허권자가 아닌 자로 기업을 분류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술에 관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보유한 기업, 이를 <특허권자 기업>이라고 칭해보지요. 그리고 해당 기술과 관련된 시장에서 그 특허권자 기업과 경쟁하는 기업을 <경쟁자 기업>이라고 표현해 보겠습니다. 누가 산업의 주체이며 누가 시장에서 존중 받아야 합니까? 둘 다 입니다. 당연하죠. 이 당연한 문답이야말로 특허경쟁력을 따짐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특허경쟁력 운운하면서 특허권자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특허권자 기업만으로는 시장이 굴러가지 않습니다. 시장이든 국가든 산업이든 어떻게 표현하든 경제가 이루어지려면 경쟁자 기업의 이익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인류사를 돌이켜 봐도 기술의 발전은 여럿이 힘을 쓸 때 더 빠르고 크게 발전합니다. 즉, 특허경쟁력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사용할 때에는 항상 특허권자 기업뿐만 아니라 경쟁자 기업의 이익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특허제도는 특허권자 기업과 경쟁자 기업을 차별 대우합니다. 국가 행정기관은 특허권자 기업에게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법원은 기본적으로 권리자를 보호하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법치국가의 보통 원리입니다. 하지만 법률은 많거든요. 이 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법도 있습니다. 시장에서의 독점적 차별대우는 공정거래를 해치고 시장을 파괴합니다. 특허권자 기업이 대기업이거나 선발경쟁자라면 시장을 선점한 상태에서 특허로 이중 독점을 시도하기 때문에 후발경쟁자가 극심한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특허제도로부터 비롯된 차별 대우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한계가 바로 보호할 가치가 사라진 특허는 소멸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당 특허가 소멸되면 특허권자 기업과 경쟁자 기업의 분류도 소멸합니다. 특허가 소멸되면 누구나 자유롭게 그 기술을 이용할 수 있지요. 존속기간만료제도는 특허가 20년의 제한적인 소유권임을 원칙적으로 천명합니다. 등록료 미납 소멸제도는 특허제도와 시장을 밀접하게 연결합니다. 시장에서 망하면 자연스럽게 특허도 없어지도록 유도하여 특허제도를 보완했습니다. 2015년 현재 1,540,235건의 특허가 등록되었으나, 그 중 627,792건이 소멸되었습니다. 무려 40.8%에 이릅니다(특허청 2016년 지식재산백서 중). 이 두 가지 제도는 국가가 특허권자 기업의 독점을 제한하려는 조치입니다. 경쟁자 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조치할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특허무효 제도입니다.

하지만 경쟁자 기업에 의해서 무효가 되는 특허보다 특허권자 기업 스스로 포기하는 특허가 훨씬 많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특허권자 기업은 자기가 갖고 있는 특허를 포기할까요? 시장에서 망해서 특허를 관리할 역량을 잃었거나, 특허기술이 보호할만한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겠죠.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누구도 특허경쟁력을 언급하지 않더군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특허가 그렇게 대규모로 소멸되는 만큼 기술 공유의 영역이 증가해서 시장과 산업에 이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술 공유의 영역은 무주공산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일어나지요. 새로운 기술혁신과 새로운 특허활동이 생깁니다.

다시 특허무효제도로 돌아와 봅시다. 보호할만한 가치가 없는 특허라면 특허권자 기업의 이익보다 경쟁자 기업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독점은 예외적인 것이고, 예외는 독창적이며 진보적인 기술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생긴 것인데, 그 예외 조항이 사라졌다면 그것을 무효로 정화시키는 것이 시장과 산업의 발전을 위해 타당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특허무효제도는 시장에서 비롯됩니다. 특허무효심판을 청구하기 전에 특허분쟁이 있었을 것이고, 특허분쟁이 벌어지려면 시장에서의 충돌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저는 그래서 특허무효는 특허제도에 대한 시장의 정화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등록료 불납 등에 의한 소멸도 마찬가지로 시장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고요.

이처럼 특허제도와 시장의 영향력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은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의 특허경쟁력이란 무엇일까요? 특허권이라는 결과로 특허경쟁력을 가늠하는 생각보다는, 특허활동을 통해서 기업의 혁신문화가 어떻게 자극되는지를 저는 중시합니다. 특허무효율이 이슈였으므로 일단은 여기까지만 답하겠습니다.

어쨌든 특허무효율이 50%를 상회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아니며, 더더욱 그 원인을 특허청의 부실 심사로 유추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 비약이며,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특허청의 부실 심사를 꼬집으려면 특허무효율이 아니라 거절결정에 대한 불복절차에서 취소되는 비율을 탐구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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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 2

질문: 한국의 특허무효율이 50%를 넘는 실정입니다. 국가가 심사를 해서 특허라는 권리를 줬는데 그 중 절반이 무효가 된다면 이는 부실심사의 증거입니다. 한국의 특허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특허청의 이런 부실심사 행정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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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개념적으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의 관계와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율의 관계는 다른 범주입니다. 전자는 제도와 제도를 비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합니다. 후자는 제도와 확률을 비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것부터 설명하지요.

국민(외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이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서 특허를 받으려면 국가기관에 특허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기관은 엄정하게 특허심사를 해서 과연 독점권을 줄 수 있는 아이디어인지를 심사합니다. 법률이 정한 절차와 내용에 따라서 심사를 행합니다. 심사는 사람이 합니다. 심사관이라는 직책을 지닌 공무원이 하죠. 그런데 아이디어는 물건이 아닙니다. 감각적으로 확인해서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규격이랄 게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무형이며 눈에 보이지 않고 그래서 심사가 기계적으로 행해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허심사는 국제주의를 취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지구 전체의 관점으로 새롭고 진보적인 발명만이 특허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요. 심사관은 신청된 아이디어가 과연 지구 전체의 관점에서 독창적인지를 심사해야 합니다. 법이 그렇게 규정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심사관은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알고 있으며 모든 정보와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가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넌센스죠.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신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특허제도는 그런 전혀 가능하지 않은 것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답니다. 하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인간의 현실 사회에는 경험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사관은 선행기술을 조사해서 신청된 아이디어와 비교해야 합니다만, 산업을 선도하는 혁신적인 발명은 지구촌 일부 나라에 한정되어 있거든요. 언어처리 기술도 많이 발전했고요. 그래서 심사관은 몇몇 나라에 제한된 범위로 선행기술 조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칙에 의존해서 심사를 한다고 해서 완벽할 리는 없습니다. 공무원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도 당연히 특허심사에 개입하게 마련이고요.

그래서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특허무효 제도입니다. 국가기관의 공무원이 일차로 심사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혹시 특허권에 하자가 있는 경우에는 특허무효제도를 둬서 나중에라도 잘못된 특허를 없애도록 했습니다. 즉 특허무효는 특허심사를 보충해주는 의미이며, 아주 바람직한 제도이지요.

특허는 기술에 관한 것이고, 그 기술은 순수 학문적인 성과가 아니라 항상 시장에서의 활용을 염두에 둔 기술입니다. 시장활동이 없는 특허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시장이 없으면 특허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략 맞는 생각입니다. 시장이 소멸했다거나 시장에서 패퇴한 경쟁자의 특허는 어찌 되겠습니까? 보통은 특허도 소멸됩니다. 이것도 일종의 경험칙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자 있는 특허라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자 있는 특허가 문제가 돼서 정말 무효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그 특허와 관련된 시장이 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권리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있을 것이며, 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기업)들이 서로 싸우면서 특허무효를 다투게 한다면 좀더 낫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시장이 특허행정을 보충합니다. 그것이 특허무효 제도의 자연스러운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특허심사와 특허무효의 관계는 법제도 관점에서나 현실 시장의 관점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무효제도는 심사제도를 보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무효제도를 통해서 하자 있는 특허를 없애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애당초 하자 있는 특허가 없도록 심사하면 되지 않겠냐고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공무원은 신이 아닙니다. 국제주의를 택한 특허심사제도에 부합하지 않은 발상입니다. 공무원 개개인에게 불가능한 과제를 주면 필경 부작용이 따릅니다. 대부분의 하자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당사자에 의해서 발견되고 주장되는 것이지 국가기관의 의무가 아니라는 점, 무효특허의 출현이 시장과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 국가행정 기관이 완벽한 심사를 추구하면 공무원의 실적부담을 증가시키며 주관성을 강화시킨다는 점, 이는 발명공개에 대한 대가로서 특허처분으로 산업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기보다는 거절처분의 남용으로 특허행정을 규제행정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점, 결과적으로 특허제도가 혁신을 촉진하기보다는 가로막는 제도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골고루 생각해야 합니다.

특허심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무효율을 떨어트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특허법의 목적은 특허제도를 통해서 발명의 보호장려, 기술의 누진적 발전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허심사의 목적도 특허법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공무원은 대법관이 아닙니다. 발명의 보호 장려와 산업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제도 취지에 맞게 엄정한 심사를 하면 충분합니다. 애당초 하자가 없도록 심사를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심사해서 권리를 부여한 100건의 특허에 대해서 한두 건의 특허가 나중에 무효가 되었고, 그 이유가 당사자의 공방을 통해서 전혀 다른 증거로 무효가 되었다면 그 공무원을 탓할 수 없습니다. 행정처분에 의해서 누군가 피해를 본 것도 아니며, 혹시라도 있을 피해는 법원의 판결과 시장 경쟁력에 의해서 보상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발명에 대해서 엄격한 심사라는 미명으로 간단히 거절하고 그것이 법원절차에서 뒤집어졌다면 그 공무원의 거절처분으로 특허출원인을 피해를 입게 됩니다. 대개 대기업은 괜찮지만 중소기업이나 개인의 경우, 공연한 시간과 비용의 낭비로 시장에서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국가기관의 행정은 이런 파급력을 형량해야 합니다.

물론 엄격한 심사를 해서 특허취득율 자체를 떨어트리면 특허무효율도 낮아질 수도 있겠지요. 논리적으로는 무효의 대상이 절대적인 양이 적어졌으니까요. 하지만 권리의 하자는 공무원이 찾는 게 아닙니다. 특허분쟁이 있는 곳에 특허무효가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허의 권리존속기간은 20년이어서 과거의 특허가 분쟁에 사용될 수 있고요.

행정기관은 법률의 규정을 실행하는 역할을 합니다. 시장에서 발생되는 모든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특허심사는 행정기관에 전속합니다(물론 행정불복절차가 있습니다). 반면 특허무효는 시장에서 비롯되고(시장이 없는 곳에서 는 특허무효가 청구되지 않습니다), 무효율은 당사자가 쟁송절차에서 제출한 주장과 증거, 소송행위 등에 의해서 결정될 뿐입니다. 심사를 아주 잘했으나 특허가 무효될 수 있고, 심사를 아주 못했으나 그 특허가 무효의 대상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자가 있는 특허이지만 무효쟁송과정에서 그 하자에 부합하는 주장이나 증거가 제출되지 못한다면 유효한 특허입니다.

그러므로 “특허청의 심사행정과 특허무효율은 관련이 거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특허경쟁력과 특허무효율도 상관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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